대한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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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4733
한자 大韓陶瓷器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장지용

    [상세정보]

    성격 제조업체
    설립자 일본경질도기
    설립 시기/일시 1917년 12월 3일연표보기 - 조선경질도기로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72년연표보기 - 폐업
    개칭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조선경질도기에서 일본경질도기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일본경질도기에서 대한경질도기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50년 11월 30일연표보기 - 대한경질도기에서 대한도기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대한도기에서 대한도자기로 개칭
    최초 설립지 조선경질도기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에 있었던 도자기 제조업체.

[설립 목적]
대한도자기는 일본 이시카와 현[石川縣] 가나자와[金澤]의 지역 향토 기업이었던 일본경질도기가 도자기 제조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한 자회사이다.

[변천]
1908년(순종 2) 가나자와의 전통 자기인 쿠다니야키[九谷焼] 판매상인 하야시야 지사부로[林屋次三朗]와 가나자와의 다이묘[大名] 마에다[前田] 가문을 중심으로 한 지역 유지의 결합으로 일본경질도기가 설립되었다. 주력 생산품은 서양식 식기를 중심으로 한 생활용 도자기였다. 이후 1917년에 부산부 영선정(釜山府 瀛仙町)[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일본경질도기 분공장 건설을 결정하였다. 부산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유치 유도가 작용하였던 한편으로 교통적 입지가 대륙과 동남아 수출에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고, 주위의 풍부한 원료와 조선인 노동력의 싼 임금을 생각하면 경제성에 있어서 가나자와 공장을 능가할 것이라는 자체 경영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다.

본사에 버금가는 자본금 100만 엔[최초 불입 35만 엔]의 독립 자회사 건설이 결정되었고, 1917년 12월 3일에 조선경질도기(朝鮮硬質陶器) 건설로 구체화되었다. 규모는 종업원 300명, 사용 동력 250마력, 연간 70만 엔어치의 제품을 생산하며, 주로 대륙과 동남아 시장에 수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경질도기의 설립으로 가나자와 공장은 고급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상대적으로 고가의 제품을 생산하여 미국 및 유럽 수출과 내수에 충당하고, 조선경질도기는 낮은 기술로도 가능한 저가의 제품을 생산하여 중국 및 동남아시아 수출을 하는 전략이 실현되었다.

1925년에 당시 부산 지역의 재력가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郎]가 일본경질도기 경영권을 인수하여 본사를 부산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의 불황으로 시작된 1920년대 장기 불황의 직접적 영향으로 일본경질도기가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을 단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일본경질도기의 경영난은 카시이 겐타로 경영 체제에서도 장기간 지속되었고, 여기에는 1920년대 장기 불황의 지속과 대공황의 영향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일본경질도기가 장기간의 경영난을 벗어나 경영 정상화의 궤도에 오르는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로,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의한 만주·중국 시장의 새로운 개척, 그리고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서 벗어나면서 수출 시장이 다시 활성화된 데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경질도기의 경영 상황은 1940년대에 들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직접적인 이유는 일제의 전시 경제 구축에 있었다. 군수 산업에 자원을 집중하는 상황에서 도자기 산업은 군수 산업에 포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원의 제약 속에 생산이 위축되고 판로가 막히는 상황에서 일본경질도기의 경영난이 표면화되는 것은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부터였다.

일본경질도기는 광복 후 적산 재산으로 분류되어 적산관리인 노병기가 관리하였으며, 회사명이 대한경질도기로 변경되었다. 1950년 11월 30일에는 지영진이 4억 5,000만 환에 불하받아 대한도기로 개칭하였다. 1960년에는 부산내화공업 대표였던 최유상에게 경영권이 이전되었고, 대한도자기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후 1972년에 폐업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도자기의 주요 사업은 도자기 및 도자기 원료의 제조·판매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국과 만주 및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해 저렴한 생활용 도자기를 공급하는 전문적인 수출 기업의 성격을 가졌다. 대한도기는 핸드페인팅 기법[hand-painting technique], 인장 기법[stamping technique], 라이닝 기법[lining technique], 스프레이 기법[spraying technique], 전사 기법[decal comania], 유리 원료의 사용, 라스터 기법 등을 사용하여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도자기조선방직과 함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단 조선방직과는 달리 1925년부터 부산 지역에 본점이 있었고, 수출을 목표로 한 기업이었다. 1917년 11월에 조선방직이 설립되어, 나중에 부산 지역 제조업의 양대 축을 형성한 대규모 공장이 같은 해에 출발한 것이 된다. 물론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시 경기의 영향이 낳은 결과였고, 부산 지역 공업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6·25 전쟁 당시 피란 온 화가들이 대한도기에서 근무하여 장식품과 기념품, 수출품으로 판매되는 핸드페인팅 기법 도자기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때 생산된 도기는 주로 한국적인 풍속화나 풍경이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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