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의 숨겨진 보물 - 골목골목 깃든 삶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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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011
한자 山-寶物-
영어의미역 The Hidden Treasure of the Mountain Village —- Life and the Stories in Every Alley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영준
[부산의 산동네]
부산의 산동네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결코 사람이 살 만할 것 같지 않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집마저 불법으로 지어야 할 만큼 만만치 않던 인생들이 몰려들었다 쫓겨나기도 했던 곳, 산동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부산에서, 토박이가 드물 정도로 외지 사람들이 많았던 부산의 역사에서, 산동네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봤던 경험이 있을 정도로 필수 코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산동네에는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며 모진 풍파를 견뎌왔던 부산과 부산 사람들의 애환과 흔적이 어려 있다. 서민들의 원초적 생활 공간이라는 위상과 함께 지역적 정체성의 원형질로서의 ‘부산성’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동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보는 작업은 작지 않은 일일 터이다.

산동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떤 역사를 가지고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왔을까? 이곳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을까? 산복 도로로도 대표되는 부산 산동네의 독특한 경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일무이한 공간이다. 높은 곳에 살지만 낮은 곳에 살기를 바라던 산복 도로 사람들이 오가는 산동네의 추억에는 어제의 부산이 밟았던 길이 있고, 오늘의 부산을 만든 길이 있고, 내일의 부산이 가야 할 길이 있다. 낙후되고 재개발도 힘들었던 부산의 산동네에 숨겨진 보물은 무엇인지, 산동네 골목골목마다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찾아가보자.

[산동네로 모여든 사람]
부산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급속히 개발된 근대적 정체성의 도시였다. 지형적으로 평지가 협소하여 거주 가능한 면적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부산은 그마저도 산과 바다 사이에서 좁고 긴 모양의 선형이라 확장하기 어려운 도시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09년부터 시행된 일본의 각종 매축 공사와 토지 구획 정리 사업, 수도·항만·철도 등의 사회 기반 시설 등이 세워지면서부터 부산은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인구도 본격적으로 증가하였다.

부산의 산동네는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형성되기 시작한 독특한 도시 공간이다. 1920년대 초 부산은 공업과 대일 무역의 성장, 대규모 매축 공사 등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유입되는 조선인 노동자 수가 급증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과도하게 증가하자 이들의 임금이 떨어지고 고용 구조도 불안해지게 된다. 결국 조선인 노동자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대개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일거리를 얻기 위해 도심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의 외곽에 있는 산비탈이나 고개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이처럼 산동네의 형성은 일제 강점기에 부산으로 몰려든 부두·방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담고 있는 산물이었다.

산동네와 관련한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조선인은 평지에 집을 얻지 못하여 부산진 본전 사면팔방으로 산상에다 집을 지었는데[『동아 일보』, 1925. 6. 20],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산비탈에 마음대로 불규칙하게 지은 토막과 빠락[바라크] 사이로 꼬불꼬불하고 험악한 길이 거미줄 모양으로 엉키어 여름철이나 비가 계속 오면 교통은 차단되고 도로는 진흙으로 흙바닥을 이루어 다니는 사람들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동아 일보』, 1934. 3. 31]고 전하고 있다. 당시 조선인 밀집 지역의 거주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부산은 각지에서 귀환한 동포들로 북새통이 된다. 일제에 의해 건설된 인구 30만의 계획도시에 약 100만의 인구가 밀집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귀환 동포들 중 국내에 오갈 곳 없던 이들의 태반이 부산에 눌러 앉게 되고, 6·25 전쟁을 피해 유일한 비전투 지역이었던 부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부산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인구가 한정된 가용지에 몰려들어 주택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당시 부산에는 3만여 명을 수용한 적기 수용소, 영도구 봉래동의 대한도기회사 터, 대연 고개, 남부민동 등 전쟁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40여 개가 있었지만 수용 인원은 고작 7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40만 명가량 달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력이 약하고 친척이 없이 피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용두산 공원이나 천마산, 수정산 자락에 삶의 둥지를 틀었었다. 산동네는 6·25 전쟁의 경험이 그대로 엉켜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부산을 찾아온 이주민들은 미군들의 폐품으로 나온 깡통을 펴서 엮어 만든 양철 판이나 군수 물자를 포장했던 박스를 사용한다든지 판자·콜타르를 바른 미군용 야전 식량 박스[일명 볼박스] 등으로 얼키설키 엮은 무허가 판잣집인 이른바 하꼬방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자갈치 시장의 경우 영도 대교 입구에서부터 보수천 남항 유입 지역에 이르는 전 지역에 판잣집이 촘촘히 들어섰고, 국제 시장자갈치 시장은 판자 상가가 밀집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용두산, 복병산, 천마산, 보수산, 구봉산, 수정산, 구덕산 등의 비탈들도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부경역사연구소에 따르면 휴전 직후 이런 판잣집들이 용두산 산비탈을 중심으로 중구 관내에만 1만 5000여 채, 시내 전체로는 4만여 채가 있었다고 추산된다.

늦게 온 사람들일수록,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점점 더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우암동의 경우 몰려드는 피난민들은 병든 소 화장터 주변과 개울 주변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점차 공동묘지 있는 곳까지 확장하였다. 나무, 판자, 가마니, 골판지, 루핑 등으로 바람만 들어오지 않게 하고 살다가 초막을 짓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공동 화장실과 급수차에 의지하며 40계단과 UN 고개를 넘나들었고, 다림질, 날품팔이, 노점상 등으로 가계를 꾸렸다. 깡통으로 판잣집 지붕을 만드는 ‘깡깡이’나 철길에서 석탄 부스러기를 줍는 ‘코크스 수집업’, 구제품과 자물쇠를 파는 ‘샌드위치맨’도 당시 생겨난 직업들이었다.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부산의 외형도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피난민들이 부산의 주 서민층을 담당하게 되었고, 휴전 이후 산동네는 자연스레 돌아갈 곳 없는 서민들의 정착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항만 하역 부두 노동자, 신발 공장 노동자로 대표되는 탈 농촌 도시 근로자들이 산업화 과정 속에 몰려들어 살게 된 곳도 산동네였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이 산동네에 정착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내부 구성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기억을 함께 한 운명 공동체적 이웃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유입된 이웃들이 동네에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관계도 실리적이고 익명적인 관계로 변해갔다.

1955~1964년에 부산시는 도시 환경 개선과 미관을 이유로 판자촌에 대한 강제 철거와 철거민들에 대한 도심 외곽 강제 이주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계획적인 이주지는 개발되지 못한 채 강제 철거만 시행되었기 때문에 산동네 특유의 자생적 형태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주택 개량에 의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불량 주택 개량 사업이 시행되었다. 도시 계획 차원에서의 정책 이주 사업은 197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규모나 시설 면에서는 아직 영세하였다.

1980년 도심 재개발 추진 계획을 추진하면서 현지 개량과 철거 이주를 원칙으로 연립 주택지와 시영, 주공 임대 아파트가 지어지게 되었다. 서구 아미동, 범천동, 개금동에 각각 임대 및 분양을 목적으로 시영 주택이 건설되었으며, 200만 호 주택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개금동에 영구 임대 주택, 근로자 주택, 소형 분양 주택이 각각 건립되었다.

[산동네 분포]
현재 부산광역시 전체 산동네 6곳, 78개 동에 걸쳐 130여 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산동네들은 수정산, 봉래산, 황령산 등의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체로 부산의 원도심(原都心)이라 불리는 지역들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수정산 일원의 산동네는 망양로, 엄광로 등을 연결하는 17개 도로[총 연장 35.3㎞의 산복 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는데 동구, 부산진구, 사상구, 사하구, 서구, 중구 등 총 6개구 54개 행정동을 연결하고 있다. 수정산 일원의 산동네 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곳이다.

산복 도로의 산동네들과 천마산 아래의 동네들은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과 그 위로 부서지는 배와 파도를 볼 수 있고, 때로는 산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망양로부산항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부산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기도 한다. 등산로와 시락국밥으로 유명한 구덕산 기슭의 꽃마을, 통일교 성지와 오리고기 등으로 이름난 수정산 자락의 안창 마을, 태극도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감천 문화 마을 역시 수정산 일원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새띠 고개, 대티 고개, 까치 고개, 구덕 고개, 영선 고개, 성북 고개 등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래산 일원의 산동네는 영도봉래길, 절영로, 하나길을 연결하는 3개 도로[총 연장 8.4㎞]를 이루고 있으며, 영도구 전체 11개 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부산항의 전경과 밤바다를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망양로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아리랑 고개와 영선 고개가 위치해 있다. 황령산 일원의 산동네는 진남로 6.3㎞ 구간으로 남구, 부산진구, 연제구 등 총 3개구 18개 행정동을 연결하고 있다. 연산동물만골 마을, 문현동의 돌산 마을 등이 황령산 산복 도로를 둘러싸고 위치해 있다.

산동네는 부산의 역사적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으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집단 기억의 원형이다. 산동네에는 부산의 여러 역사적 경험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다양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부산이라는 도시의 독특한 역사성을 산동네에서 본다. 산동네를 보면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산동네 사람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생활 양식과 문화가 있다. 부산의 산허리를 굽이굽이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산동네를 오늘날 우리가 또다시 주목하고 그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동네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령화 비율이 높으며, 생활환경도 여타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산동네 지역의 고령화 지수는 101.64로 부산광역시 전체 평균인 70.31을 크게 웃도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모질었던 시절을 살아내고 나니 세상이 변해 자식들은 장성해서 산동네를 떠났다. 세월을 이고 선 집들만이 남았고, 변해버린 세상을 따라나설 수 없는 노인들만이 산동네에 남았다.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산동네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어 나이 든 부모님들만 거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들은 20~30여 년을 살아온 산동네의 토박이들이다. 또한 산동네는 다른 지역에서 부산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터를 잡기까지 살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산동네는 토박이와 뜨내기가 공존하는 곳이자 사람들의 왕래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산동네 사람들은 직장 생활은 평지에서 영위하고, 주거 생활은 산동네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산동네는 자연스레 서민들의 안식처이자 부산의 배후 주거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산동네 사람들은 평지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빈곤할지 몰라도 내부 생활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평등하다.

산동네에 집이 먼저 들어서고 그 위에 골목이 생기고 나서 다시 주택을 개발하는 과정을 거친다. 산동네 마을의 부정형적 도시 구조와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에 밀려 부산에 정착한 사람들이 막다른 삶의 길에서 뚫어낸 서민적 삶의 역사적 과정을 읽는 상징적인 텍스트이다. 산동네 마을은 부산 원도심의 대표적 특징들을 공유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산복 도로는 주민들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키고 시간 활용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동네 주민의 대다수를 구성하던 노동자들과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일터가 산복 도로가 생겨나면서부터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산복 도로는 시내와 연결되는 도로 아래쪽 동네와 시내와 단절되는 윗동네로 양분되었다.

빽빽이 들어선 산동네 마을의 높은 주거 밀도는 조그마한 여분의 공간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생활 문화를 낳았다.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옥상 주차장과 등산로와 연결된 텃밭이 그것이다. 옥상 주차장은 산복 도로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단독 주택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활용한 것이다. 도로가 좁고 경사가 급한 산동네에서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옥상 주차장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산복 도로의 옥상은 비단 주차장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빨래를 말리는 곳으로, 아이들의 놀이터로, 옥상 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산비탈에 주택들이 조밀하게 지어져 있다 보니 아랫집의 옥상은 윗집의 마당이 된다.

고지대 밀집 주거 지역인 산동네에서 일상다반사가 되어 버린 주차난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서 시행하고 있는 시간제 노상 주차제, 일명 개구리 주차 역시 산동네 마을의 특이한 생활 문화이다. 왕복 2차로 이상의 고지대 산복 도로와 4차로 이상의 도심 외곽 간선 도로를 대상으로 너비가 3m 이상 확보되어 차량 통행과 보행에 지장이 없는 도로에 한해서 차도와 보도 일부를 활용하여 주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동대신동에서 보수동으로 이어지는 산복 도로에 가면 개구리 주차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산동네의 좁은 골목을 살펴보면 산동네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은 게임방으로, 중·고등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으로, 아지매와 아제들은 맞벌이로 생활 전선에 뛰어드느라 서로 바쁘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 어린 아이들이 삼삼오오 골목에 모여서 뛰노는 모습을 그나마 지켜볼 수 있고, 손자를 업고 나온 할머니들의 사람 구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골목의 옛 풍경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산동네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집의 대문은 열어놓는 경우가 많다. 산동네는 인적이 드물어 다른 지역의 거주민들이 잘 다니지 않는데다가 내지인들 간의 접촉이 빈번한 까닭에 골목은 좁더라도 주민들 사이의 인정은 도탑고 넉넉하다. 때로는 독거노인을 방문하는 사회 복지사나 자원봉사자를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소통하는 골목의 이미지는 획일화되어 가는 도시성 속에 희미해지고 있고, 골목 풍경의 전형은 산동네 사람들의 가난이 겨우 붙잡고 있는 형편이다.

당장의 산동네에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더 많다. 여가 시설, 문화 시설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더라도 사회 기반 시설이라 할 병원, 학교까지의 거리 역시 멀기만 하다. 더군다나 부산광역시청의 이전, 소비와 유통의 중심이 남포동에서 서면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원도심의 기능은 쇠락하게 되었다. 원도심의 기능 상실은 사람들의 고용이나 생활 소득 등에 있어서도 감소를 가져오게 했고, 젊은 인구들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산동네를 빠져나가게 되었다. 열악한 주거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의 여파는 산동네 학교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에게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또다시 이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산동네에는 꿈이 있다. 물만골에는 불량 주택 철거에 맞서다 가슴 속 이야기들을 터놓게 된 주민 공동체가 있고, 감천 문화 마을에는 일부러 평지의 아파트를 팔아 들어온 노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카페가 있다. 아미동에서는 회원 수 200명이 넘는 ‘1% 사랑 나눔회’나 ‘토박이 모임’이 자선 행사를 펼치기도 한다. 닥밭골 마을 사람들은 빈집만 늘어가던 곳에 북 카페를 열어 행복 마을로 바꾸었고, 산만디 트레킹을 하며 생활 협동 조합을 꿈꾸기도 한다.

감천 문화 마을의 태극도나 안창 마을의 통일교 성지는 주류 종교와 더불어 자라온 다종다양한 한국 정신문화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산동네에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점집과 무속인들은 매순간 역사에서 외면당해 왔던 서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고치고 바꾸려 하며 남루한 현실을 견디고 버텨내려던 안간힘의 흔적이기도 하다. 동네의 안녕을 빌던 사당 역시 주민들의 내면의 기억을 안고 있다.

[산동네의 경관]
산동네는 아파트가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부분 단독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택들은 비탈진 곳에 터를 닦고 지어져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은 좁고 미로처럼 얽혀진 골목과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계단과 골목들은 부산의 산을 따라서 펼쳐져 있으며, 시내와 산동네는 산복 도로라는 독특한 조망을 가진 길이 이어주고 있다.

어느 산자락을 올라가도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거기에 길이 나 있다. 산동네의 길은 구불구불하며 가파르다. 구획된 길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들이라 반듯하지 않다. 불규칙적인 길이 주는 다양함은 평지의 획일화된 가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재미를 준다. 비단 사람 다니는 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산복 도로 사람들의 자가용이라 할 만한 마을버스는 하루 종일 구불구불 가파른 길을 오르내린다. 내리막길을 조심해서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오르막길이 나온다. 더구나 골목마다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피해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곡예와도 같다.

산동네는 지리적으로 수도와 가스관을 설치하기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재개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공동 우물과 공동 수도를 이용해왔다. 연료에 있어서도 도시 가스관을 매설하기 용이하지 않아 취사 연료로 LPG 가스를, 난방 연료로 기름보일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산동네에서는 석유 배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골목이 좁아 기름차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기름차보다 호스가 더 길고, 호스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말통에 기름을 싣고 사람이 직접 배달을 하기도 한다.

산동네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곳에 비해 높은 산에 위치해 있어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려야 한다. 급한 경사와 계단은 평지에 비해 다양한 조망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멀리서 산동네를 바라보면 산과 조밀하게 구성된 주택들 사이로 옥상 주차장과 노랑·파랑 물탱크들, LPG 가스통과 철제 석유통 등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주택 옥상마다 있던 폐 물탱크를 텃밭으로 바꾸는 아이디어로 알록달록한 경관을 더했다.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산복 도로만의 독특한 경관은 매력과 감탄을 자아내는 부산의 자랑거리다.

도심의 가로 경관이 공간의 효율성을 미덕으로 삼고서 획일적으로 추구해 온 서구적 건축 기법에 몸살을 앓을 때, 산동네는 비록 고육지책이었지만 서민들 나름의 주체적 대응이 녹아 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부산 산동네의 절묘한 경관을 이루는 뼈대가 되었다. 산동네는 서민들의 역사적 경험이 흔적으로 남은 곳이지만, 이러한 흔적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피난민들이 만들어왔던 공간적 삶의 흔적들은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으며, 부산의 도시 브랜드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전국 각지를 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산동네 골목골목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관람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독특한 산동네의 아름다운 경관을 렌즈에 담아내고자 한다. 물론 그들의 사진과 기억 속에 산동네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까지 담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산동네의 독특한 경험이 세대와 계층을 넘어서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로 자리매김함으로서 부산의 산동네가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산동네의 아름다운 경관들이 단순한 관광 기획 상품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성을 접합시킬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감천 문화 마을로 거듭난 태극도 마을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한반도 지형을 조망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다종다색의 옥상 물통과 집들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탐내는 출사지가 되었다. 감천 문화 마을은 ‘레고 마을’, ‘한국의 마추픽추’,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형성되었던 소수 종교 신도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곳이 이제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문화 마을로 거듭난 것이다.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
부산시는 창조적 도시 재생을 목적으로 다양한 도시 재생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 일환이 201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산복 도로 르네상스 사업이다. 이 사업은 2020년까지 1,500억여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공간 재생, 생활 재생, 문화 재생의 종합적 도시 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의 토건적 도시 재생에서 벗어나 역사와 지역 자원을 활용하여 산동네만의 고유한 특성을 개발하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동네를 둘러싼 몇 가지 딜레마들을 지적하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산동네는 구릉지에 입지해 있어 개발에 제약이 있다. 산동네 거주 지역의 건축물들은 표고 100m 내외의 경사지에 있는데, 반수 이상의 주택들이 1980년대 이전에 지은 건축물들이다. 이들 지역 중 상당수는 주거 환경 정비 사업 지구로 지정되었지만, 현행의 정비 방식은 사업성이 낮아 전면적인 개발이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재개발이나 재건축과는 달리 주거 환경 개선 사업 지구는 현지 개량 중심의 주거 환경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개발 시 난개발에 대한 우려와 거주민의 재정착에 대한 애로 사항도 지적되고 있다.

산동네 일대를 고층 아파트로 개발할 경우 구릉지에 입지해 있는 조건 상 스카이라인을 훼손할 수 있으며, 기반 시설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난개발에 대한 우려도 있다. 산동네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재개발은 전세 대란이나 빈곤한 주민들의 재입주의 어려움을 야기하여 서민들이 생존권과 주거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산동네가 지켜온 지역 공동체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주민 참여와 공감대 형성이 미흡한 지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주거 환경 개선에 있어서 전면 개발과 점진적 개발을 주장하는 측 사이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한 녹지나 공공 공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부산발전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2009년 현재 산복 도로 지역 주민들은 문화 시설[40.9%], 여가 시설[20.0%], 편의 시설[19.7%] 등 보편적 공공 편의 시설에 대한 불만이 높으며, 산책로나 분수대 같은 지역 내 여가 시설[53.5%], 광장이나 가로등 같은 보행 환경에 대한 정비[24.7%]를 가장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천 문화 마을은 평일에도 200~300명이, 주말에는 1,000여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찾는다. 감천 문화 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아 감천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하늘마루 전망대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을 정보 센터에서 일하는 송미선 씨는 “문화 마을이 된 이후 주민의 일자리가 늘고 마을에 활력이 넘치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다 보니 사진 촬영이나 소음으로 인해 주민이 피해를 보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마을 주민 ㄱ씨는 “자고 싶어도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고, 일자리도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지 늘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서구의 닥밭골 마을은 1970년대의 모습 그대로 정체되어 있던 곳으로 마을에 빈집이 늘고 이에 따라 범죄에 대한 우려도 커지자, 주민 자치 위원들이 사람들이 찾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벽화 마을로 변신시켰다. 서구청 창조 도시 전략반 윤성욱 씨는 왜 하필 벽화 마을이라는 형태로 도시 재생 사업을 시행하느냐는 질문에 “예산이 적은 상황에서 언론을 통해 마을에 관한 관심을 크게 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며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벽화 사업이 선호되고 있는 실태에 대해 지적하였다.

[공공 미술 프로젝트 사진-벽화 혹은 조형물]
이처럼 마을 미술 프로젝트와 연관된 공공 미술 사업은 ‘참여’와 ‘소통’을 토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단발적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마을이나 지역별로 뚜렷한 차별성이 없이 획일화된 모습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무엇보다 마을의 재생이라는 미명 하에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이 피해를 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된 측면도 있다. 새롭게 바뀐 마을에서 정작 마을 주민은 소외되고 외부인인 관광객이 우선시되는 상황은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감천 문화 마을 주민 ㄴ씨는 마을을 찾는 외부인들 탓에 자신이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며 속상함을 표하기도 했다. 오선영의 소설 「해바라기 벽」에 나타난 “니들이 뭔데, 남의 집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는 바로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주민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그려진 벽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동네가 관광 부산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루 1,000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코스도 많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원도심 상권이 살아나는 징후가 뚜렷이 포착되는 것도 긍정적 평가를 얻기에 충분하다. 동구 부산역에서 산복 도로 체험관인 까꼬막에 이르는 이바구길[1.5㎞]에 있는 이바구 공작소도 인기다. 부산 최초의 물류 창고인 남선 창고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임시 정부 시절 찾았던 초량성당,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인 김민부의 전망대, 장기려 박사의 더 나눔 센터가 모두 이바구길에 위치해 있어 스토리가 있는 관광으로 반응이 뜨겁다.

산동네는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한다. 산동네 개발은 원도심 낙후 지역에 대한 창조적 도시 재생이라는 문제 인식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원도심을 둘러싸고 형성된 산동네 지역의 형성 배경과 역사, 기능들의 다양성과 독특성을 감안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들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동네의 개발 방향은 ‘볼거리’와 ‘삶이 있는 생활 공간’으로서의 산동네가 다르지 않은 동일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내부 거주자들과의 소통과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산동네의 개발이 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편의성을 더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넘어서서 산동네 사람들이 관광객들에 의해 대상화되어 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거지 않을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꾸미고 채색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생활 공간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아가 원도심 자체에 대한 개발과 산동네의 개발이 긴밀히 연결되고 순환되는 정책적 시각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원도심의 개발은 아름다운 산동네의 독특한 조망권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발과 보존은 갈림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을 구성하고 있는 양측의 가장자리일 것이다. 산동네의 역동성과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문화적 감수성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적 도구로서의 개발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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