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야구의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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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015
한자 釜山野球-證人-
영어의미역 Witnesses of Busan Baseball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태우
[부산 야구의 기원]
한국 야구는 국내 최초의 팀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황성YMCA야구단]이 창설된 1905년을 야구사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국인에게 처음 야구를 본격적으로 가르친 사람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필립 질레트 선교사였다. 필립 질레트는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한국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는 야구라는 서양 운동을 신기하게 생각한 젊은이들이 짚신을 신은 채 공을 던지고 치고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제 야구를 처음 한반도에 선보인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은 1873년에 야구를 처음 시작하였고 정부 차원에서 학원 스포츠로 적극 장려하였다. 대륙 진출을 위해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한 일본은 각 역마다 야구팀을 만들었다.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 부산에도 당연히 일본을 거쳐 야구가 들어왔다. 부산에는 정식 한국인 팀은 많지 않았지만 일본인 팀 여러 개가 개화기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야구를 즐겼던 일본인들은 선수가 모자랄 경우 자신들이 직원으로 데리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함께 경기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부산에서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 이전에 이미 한국인 팀이 있었고, 그래서 한국 야구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 같은 내용은 1999년 대한야구협회가 발간한 『한국 야구사』에도 나와 있다. 『한국 야구사』는 “시대적 배경으로 미루어 야구는 일본 사람의 손을 거쳐 들어왔으리라고 오해할 소지는 다분하다.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욕을 고스란히 실어 철도를 부설하고 그 요충지마다 야구팀을 만들고 화물 야적장을 이용해서 수시로 야구 경기를 즐겼기 때문에 이 땅에 야구를 들여온 것은 일본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인들이 야구를 주로 즐긴 곳은 앞에서도 나왔듯이 철도, 화물 야적장 등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로 활동한 무대는 항만이나 철도역 인근이었다. 이런 점에서 항만과 철도가 일찍부터 존재하였던 부산에서 일본인들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먼저 야구를 즐겼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야구사』에는 “1920년 7월 17일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 5차 모국 방문 야구단이 부산을 찾아 초량구락부, 부산진과 경기를 가졌다.”고 나와 있다. 당시 유학생 팀은 7 대 4, 4 대 2로 모두 이겼다. 또한 『한국 야구사』에 따르면 1921년 한국인의 초량구락부가 일본인의 부산세관군과 경기를 치러 8 대 6으로 이겼다. 이 경기와 관련한 일화도 『한국 야구사』에 전해진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초량구락부는 1921년 5월 대정 공원에서 일본인 팀인 부산세관군과 일전을 벌였다. 관중이 빼곡히 둘러싼 가운데 초량군은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 8 대 6으로 이겼다. 그러나 부산세관군은 자신들이 8 대 6으로 이겼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신문인 『경성 일보』와 『부산 일보』[현재의 『부산 일보』와는 다른 신문]도 부산세관군이 승리하였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초량군은 신문사를 찾아가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한국 야구사』 중]

이 같은 기록을 종합해 볼 경우 일본인들이 야구를 즐겼던 부산에서는 이미 1910년대 이전부터 한국인들로 구성된 팀이 존재하였으며 일본인과 또는 한국인끼리 경기를 펼쳤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부산 야구는 체육협회라는 단체에서 총괄해 오다 1924년 5월부터 부산야구협회로 단체 이름이 바뀌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은 마침내 명실상부한 한국 야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각종 전국 대회에서 부산 출신 팀들이 연거푸 우승하는가 하면 부산에 전국 대회까지 생겨났다. 1949년 산업신문사 김지태 사장이 만든 전국 중등학교 초청 야구 대회가 바로 그 대회였다. 첫 대회에는 부산 6개, 경남 2개, 서울 2개, 경북 1개 등 모두 11개 팀이 출전하였다. 이후 전국 중등학교 초청 야구 대회는 6·25 전쟁이 끝난 뒤 국제신보사에 의해 계속 열리다 1974년 제26회부터는 화랑기 쟁탈 전국 고교 야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한야구협회가 고교 야구 주말 리그 제도를 만들면서 화랑기 쟁탈 전국 고교 야구는 2011년부터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부산 야구]
1. 부산공립상업학교 야구부

일제 강점기 때 부산에서 야구부를 가장 먼저 만든 곳은 부산공립상업학교였다. 이 때 부산에는 상업 학교로, 일본인이 다니던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해방 후 경남상업고등학교로 개칭, 현 부경고등학교], 한국인이 다니던 부산제2공립상업학교[해방 후 부산상업고등학교로 개칭, 현 개성고등학교]가 있었다.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는 1923년 4월 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서면으로 이전할 때 널찍한 운동장을 만들면서 야구부를 창단하였다.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는 1929~1939년까지 일본 고시엔 대회 한국 예선에 출전하였지만 항상 실패만 맛보았다.

2. 동래고등보통학교 야구부

이어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하였다. 원래 1920년부터 일부 학생들끼리 야구를 즐기다 1926년 정식으로 야구팀을 만들었다. 『한국 야구사』에 보면 1926년에 동래고등보통학교 야구부 창단 멤버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주축 선수는 이상도와 염갑출, 박정준, 최학수의 4명이었다. 이어 야구부에 합류한 선수들로 이상훈, 정보라, 서진달, 유석주, 박차원 등이 있었다. 1928년에는 이사영, 김복만, 김영대, 김종극, 김춘생, 김남귀, 이상돈 등이 포함되었다.

1932년 갑자원 대회 조선 예선 결승전에 나선 동래고등보통학교 선수들 명단도 전해진다. 투수 김춘생, 포수 이사영, 1루수 공지운, 2루수 김복만, 3루수 김영대, 유격수 문작지, 좌익수 박경훈, 중견수 김남귀, 우익수 김종민이었다.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수준이었지만 이들이 졸업한 뒤 전력이 약해졌다. 김필수, 조성훈, 정수복, 정종학, 이종태, 이상경, 박장훈, 김인수, 신수봉, 서현태 등이 뒤를 이었지만 그다지 빼어난 선수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후 침체기에 빠졌던 동래고등보통학교는 1938년 박봉조, 장종기(張鍾基)를 앞세운 선수단으로 재기에 성공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최강이었던 부산철도국을 누르기도 하였다. 당시 선수로는 주장 겸 포수 박봉조, 투수 장종기, 1루수 박종표, 2루수 김성근, 3루수 장형기, 유격수 윤철주, 좌익수 성도호, 중견수 성태수, 우익수 한원상이었다. 당시 선수들 가운데 현재 살아 있는 최고령 야구 원로인 박봉조[1920~ ]는 『부산 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일제 강점기 야구 이야기를 전한다. 박봉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인 야구 전래설의 타당성에 힘이 실린다.

“9살이던 지난 1929년 처음 야구공과 글러브를 잡아봤다.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다. 당시 이웃이었던 하라다 양조장의 주인이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동네 아이들을 모아 야구를 시킨 것이다. 이때 야구를 시작한 인연으로 동래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포지션은 포수였다.

동래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1938년에는 당시 부산 최강이던 일본인 팀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를 ‘조선인 팀’으로서는 처음 꺾는 감격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인 팀과 시합할 때면 거의 싸움이 벌어졌다. 1938년 서울에서 열린 일본 갑자원 대회 한국 예선 준결승에서 일본인 학교인 경성고등상업학교와 경기 때 일본인 심판이 노골적인 편파 판정을 일삼아 한국과 일본인 응원단이 서로 돌을 던지며 패싸움을 벌였다.

학교 선수로서 활약을 인정받아 1939년 일본인 실업 팀이던 부산철도에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50원을 받고 스카우트되기도 하였다. 부산철도에 수많은 선수가 거쳐 갔지만 한국인 선수는 나 말고 이상문, 김필수, 박인홍, 박상화 등 모두 5명뿐이었다. 부산철도에 소속되어 만주 원정길에 부산을 찾은 와세다, 메이지 등 일본 대학 팀들과 수시로 시합을 가졌다. 이후 1943년 일본 군부에 의해 야구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부산철도 선수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에는 야구 국가 대표 창단 멤버가 되어 주한 미군과 친선 경기를 갖기도 하였으며 1950년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하였다.”[『부산 일보』 기사 중]

동래고등보통학교는 1940년에는 고시엔 지역 예선 준결승에 올랐다가 심판의 편파 판정 끝에 일본인 팀인 평양제1중학교에게 2 대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당시 멤버로는 투수 장종기, 포수 가야, 1루수 나봉호, 2루수 한원상, 3루수 차병렬, 유격수 김영환, 좌익수 최인규, 중견수 성도호, 우익수 신용오 외에 후보로 이칠영이 있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사가 제1회 조선 야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다. 1936년 13회까지 열린 조선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부산에서는 전부산, 부산철도, 부산실업 등의 팀이 출전하였다. 모든 선수들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일부 선수들의 이름과 포지션, 출전 연도 등은 기록에 남아 있다. 박상화는 1933년, 1934년에 부산철도 유격수로, 박백수는 1936년 전부산 우익수로, 이상문은 1932년에는 부산철도 3루수와 유격수, 1936년에는 전부산 유격수로 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3.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이팔룡

1920년 일본 야구는 프로화를 모색하였다. 초창기 조선에서도 일부 선수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그중 몇몇은 실제로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하였다. 일본에서 뛴 한국 선수 중 가장 유명하였던 사람은 부산 출신인 이팔룡(李八龍)[1918~1997]이었다. 1918년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난 이팔룡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모노세키[下關]로 건너갔다. 시모노세키상업고등학교와 메이지대학을 나온 이팔룡은 194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50년 니시니혼 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일본에서 13년 동안 200승에 평균 자책점 1.90을 기록하였다.

1950년 『경향 신문』은 「후지모토 이 군 귀국?」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팔룡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외국에 가서 특수한 기량을 발휘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번 재일대한체육회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야구 핏차 또는 외야수로 전 일본 야구계를 압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본명 이팔룡보다 후지모토 히데오로 알려지고 있는데 명대[메이지대학]를 졸업 후 거인군을 거쳐 현재는 전일본군에 소속되어 있다. 218회 출전, 승전 124회에 안타 불허가 767회의 기록을 갖고 있다.[『경향 신문』 기사 중]

이팔룡은 1949년 일본 프로 야구 최고 투수상인 사와무라상을 받았으며, 197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68년 한국에서 야구 강습회를 열어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부산 야구]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조선야구협회가 정식 출범하였다. 첫 대회로 그해 5월 서울 운동장에서 4도시 대항 야구 대회가 열렸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이 출전하였는데 부산은 1승 2패로 3위를 차지하였다. 이어 월계기 쟁탈 전국 도시 대항 야구 대회도 펼쳐졌다. 부산은 2회, 5회 대회에서 나란히 준우승을 차지해 강호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1. 부산 출신 투수 장종기

1946년 8월 16일에는 조미 친선 야구 대회가 열렸다. 조미 친선 야구 대회에서 가장 돋보인 선수는 부산 출신 투수 장종기[1921~ ]이었다. 한국은 1, 2회에 선발 투수 유완식의 부진 탓에 대거 4점을 내줘 0 대 4로 끌려갔다. 이때 장종기가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나섰다. 장종기는 이후 미국 타선을 꽁꽁 묶어 무실점으로 역투하였다. 한국은 장종기의 호투를 발판 삼아 추격에 나서 4 대 3까지 쫓아갔지만 아쉽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부산 일보』에 게재된 장종기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장종기는 일제 강점기 때 야구를 시작하였고, 프로 야구 출범 당시에는 규정 심의 위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그는 1930년대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였다. 부산 야구의 전설적 인물인 박봉조, 박종표 등이 그와 야구를 같이 한 사람들이었다.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그는 귀국 후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 보병 사령부 행병 보좌관으로 일하였다. 미군으로부터 야구 장비를 얻어 부산의 각 팀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야구협회를 조직하였고, 지지부진하던 동아대학교 야구부를 재정비해 감독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동아대학교 총장이 찾아와서 야구부를 활성화시켜달라더군. 그때는 감독도 없었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부산대 야구부도 만들었지.”

장종기는 경남고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야구부를 창단하였다고 한다. “경남고 교장에게 야구부를 만들라고 권하였지. 장태영(張泰英)을 발굴해 투수로 전향시켰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한일합섬 김택수(金澤壽) 회장 등이 내게 영어를 배웠어.”

장종기는 또 대한금융조합연합회 야구팀에서 선수로 뛰면서 서울 경기고 감독을 맡았다. 부산 개성중, 부산상고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거쳤다. 한국 야구에서 전설적인 인물들인 이영민, 유완식, 김영조, 장정석 등과 선수 생활을 같이 하였다.

1948년에는 서재필 박사 주도하에 대표 팀을 만들어 하와이 원정을 갈 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서 박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무산된 게 두고두고 아쉬워.”[『부산 일보』 기사 중]

2. 전국적 명성 얻은 투수 김상대

1946년 9월에는 자유신문사 주최로 광복 이후 첫 고교 야구 대회인 청룡기가 열렸다. 첫 대회 우승은 결승전에서 경남중학교[현재 경남고등학교]를 꺾은 부산상업고등학교[현재 개성고등학교]가 차지하였다. 부산상업고등학교 투수 김상대(金相大)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선수로 떠올랐다. 당시 『자유 신문』은 김상대를 극찬하는 기사를 실었다.

부산상업고등학교의 투수 김상대 군은 거대한 체구에 좋은 컨트롤을 앞세워 오히려 실업 투수를 능가할 만한 좋은 피칭을 하여 절찬을 받았다. 김 군은 삼진을 13개나 빼앗으며 무실점으로 역투해 괴력을 인정받기에 충분하였다.[『자유 신문』 기사 중]

3.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 장태영

첫 대회 우승의 영예를 놓친 경남중학교장태영은 눈물을 닦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장태영은 제1회 청룡기의 아픔을 말끔히 설욕하였다. 원래 야수였던 장태영은 투수로 변신해 경남중학교가 청룡기에서 2연패를 하고 황금 사자기에서 3연패를 하도록 이끌었다. 광주서중학교의 김양중, 동산중학교의 박현식과 함께 당대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장태영이 1948년 청룡기 2연패를 달성할 때 『동아 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남중학교 투수 장태영 군의 묘기는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였다. 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장태영은 키가 170㎝도 되지 않았지만 140㎞대의 빠른 공을 던진 덕분에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당시 동료인 황기대는 “[원래 에이스였던] 투수 장갑영의 경우 볼은 굉장히 빨랐지만, 제구력이 좀 안 좋았다. 가운데 몰릴 때도 잦았고, 폭투도 종종 나왔다. 그래서 고광적 감독이 장태영을 투수로 기용하였다.”라고 밝혔다.

장태영은 고등학교 졸업 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한 뒤에는 김양중, 박현식과 함께 육군 야구 전성시대를 열었다. 실업 야구에서는 외야수로 변신하였다. 강한 어깨와 호타 준족을 갖춰 외야수로도 성공하였다. 각종 타격상을 받으며 빼어난 타격 솜씨를 뽐냈다.

1960년 소령으로 예편한 장태영은 상업은행에서 일반 행원으로 근무하며 잠시 야구와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1961년 교통부 야구부 조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하였다. 1962년부터는 10년간 상업은행 감독을 지냈다. 장태영은 현역에서 은퇴한 뒤 대한야구협회 전무 이사와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장을 맡아 야구 행정가로도 솜씨를 발휘하였다.

4. 부산에서 열린 전국 야구 대회와 이팔관

김상대, 장태영을 앞세운 부산 야구가 명성을 높이면서 부산에서도 전국 야구 대회가 만들어졌다. 부산의 경제인 김지태가 발행하던 산업신문사가 1949년 쌍룡기 쟁탈 전국 중등 야구 대회를 만든 것이다. 첫 대회에는 경남중학교, 동래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부산공업고등학교, 경남상업고등학교의 부산 지역 6개 팀과 다른 지역 5개 팀까지 모두 11개 팀이 출전하였다. 경남중학교는 결승에서 부산상업고등학교에 20 대 4로 대승을 거둬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쌍룡기 쟁탈 전국 중등 야구 대회는 이후 부산일보사가 이어받아 화랑대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로 맥을 이어 갔다.

6·25 전쟁 기간 동안 국내에서 체육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1952년 3월 16일 대한야구협회는 부산에 있던 경상남도청에서 제6차 대의원 대회를 열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같은 해 10월 4~6일 대전에서 7개 팀이 참가하는 제7회 전국 시도 대항 대회를 개최하였다.

6·25 전쟁과 관련된 부산 투수가 있었다. 일본 프로 야구 명투수로 이름을 날린 이팔룡의 동생 이팔관(李八官)이다. 이팔관은 경남상업고등학교[현재 부경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나왔다. 1948년 제3회 전국 대학 전문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성균관대학교의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 야구사』는 6·25 전쟁과 관련된 이팔관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기 하루 전이었던 1950년 6월 24일 서울 운동장에서 제2회 학도 체육 대회 야구 결승전 성균관대 대 상과대[서울대학교 상과대학]전이 열렸다. 그때 성균관대 선발 투수가 바로 이팔관이었다. 그는 11회까지 완투하였지만 경기는 1 대 1 무승부가 되어 한국 야구사상 첫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기록되었다. 북한이 한국 전쟁을 일으킨 25일 연속 경기가 열렸다. 이팔관은 연장 15회 결승점을 내줘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를 끝으로 전쟁 기간 동안 야구는 제대로 열리지 못하였다.[『한국 야구사』 중]

이팔관은 대학 졸업 후 실업팀 조선전업에 입단하였고, 이후 1954년 도시 대항 대회에 서울 선발팀 선수로 출전하였다. 1955년에는 해군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팔관은 2년 뒤에는 해군 코치로 사령탑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에는 모교인 성균관대학교 감독으로도 오랫동안 활약하였다.

5. 부산 야구의 거목, 어우홍과 안영필

1947년 제3회 전국 지구 대표 중등학교 야구 쟁패전 결승전은 부산 야구사는 물론 한국 야구사에 명승부로 남는 경기였다. 경남중학교동래중학교가 결승에서 맞붙었다. 경남중학교는 선발 투수 장태영의 부진 탓에 9회까지 1 대 3으로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공격에서 대거 6점을 따내 7 대 3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경기에 지기는 하였지만 동래중학교에는 이후 부산 야구에 거목으로 자리 잡은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바로 어우홍(魚友洪)과 안영필(安永弼)[1924~2005]이었다.

1958년 제13회 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경남고등학교는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경남고등학교 1루수 박영길(朴永吉)[1941~ ]과 좌익수 겸 투수 김삼용(金三用)은 우승을 놓치기는 하였지만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6. 야구 선수 출신 장관, 윤천주

광복 직후 부산 야구에는 이들 이외에도 스타가 적지 않았다. 그 중 윤천주(尹天柱)[1921~2001]는 야구 선수를 하다 나중에 장관까지 한 특이한 경우다. 경상북도 선산[현재 구미시]에서 태어난 윤천주동래중학교에서 유격수로 활동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야구를 그만두고 1945년 일본에 유학 가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중퇴하였고, 1947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 하버드대학교 초빙 교수,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장, 부산대학교·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고, 문교부 장관, 제7대 국회 의원 등으로 일하였다.

7. 기교파 투수 한을룡

한을룡(韓乙龍)[1940~1999]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한을룡은 부산상업고등학교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60년 제14회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야구 쟁패전 야구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절묘한 제구력을 자랑한 기교파 투수였으며, 이후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전력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고 건국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한국전력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84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감독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0~1970년대 부산 야구]
1. 동아대학교 야구부안영필

1948년 창단한 동아대학교 야구부는 1960년대 들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60년 전국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1961년 추계 연맹전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동아대학교 야구부를 전국 정상으로 이끈 사람은 안영필이었다. 안영필동래중학교에서 3루수, 8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이후 동아대학교 감독, 야구부장 등을 맡았고, 동아대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모교는 물론 한국 대학 야구 발전에 기여하였다. 동아대학교 체육대학 학장을 맡기도 하였고, 부산시 원로체육인회 제3대 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2.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승리의 주역들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사상 처음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대표 팀에서 활약하였던 부산 출신 선수로는 성기영(成基永), 김응룡(金應龍)[이상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 김희련(金熺璉), 박영길[이상 경남고등학교 출신] 등이 있었다. 김응룡은 일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점 홈런 등으로 혼자 3타점을 뽑아내 한국의 3 대 0 승리와 함께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성기영은 경상북도 달성 출생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돌아왔다. 남일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빠른 발과 뛰어난 야구 센스로 팀에서 1, 3번 타자를 맡았다. 대신중학교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친 성기영의 포지션은 고등학교 때까지 유격수였지만 실업[육군] 시절부터 2루수로 변경하였다. 성기영은 이어 한국운수, 크라운맥주, 한일은행 등에서 현역 생활을 하다 은퇴해 모교인 부산상업고등학교에서 1976~1979년에 감독으로 일하였다. 이어 국가 대표 감독 자리도 맡았다. 1987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일하였고, 이후 삼성 라이온즈의 스카우트 부장 등을 맡았다.

한국은 1971년 다시 서울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꺾는 등 5승 1무 2패를 기록해 정상에 올랐다. 박영길은 대회 최우수 선수상과 타격상을 받았다.

3. 1970년대 이후

1976년은 부산 야구 불세출의 스타인 최동원(崔東原)[1958~2011]이 마침내 전국 스타로 태어난 해였다. 최동원은 제31회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탈삼진 20개로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최동원은 결승에서도 군산상업고등학교와 맞서 탈삼진 12개를 잡으며 팀에 대회 우승을 안겼고, 대회 최우수 선수가 되었다.

한국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사상 처음 우승을 따냈다. 당시 감독은 김응룡이었다. 또 최동원[경남고등학교 출신], 심재원, 김정수[이상 부산고등학교 출신] 등이 부산 출신으로 대회에 출전하였다.

한국은 1982년에는 어우홍 감독을 앞세워 서울에서 벌어진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어우홍은 동래중학교에서 투수로 야구를 시작하였다. 이후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전력 등 실업 팀에서 1루수로 활약하였다. 어우홍과 배터리를 이뤘던 백만수는 “눈 감고 미트만 대도 볼이 팍팍 꽂혔다.”고 말하였다. 1960년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 감독을 맡았고, 이후 경남고등학교, 한국전력공사, 동아대학교 감독을 지냈다.

어우홍은 1984~1985년에는 김동엽에 뒤이어 MBC 청룡의 감독을 맡았다. 1988~1989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일하였다. 실업 야구 시절에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프로 야구 지도자로 변신한 뒤에는 변변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어우홍은 은퇴 이후에는 야구인들의 친목 모임 일구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프로 야구 시대의 스타]
1982년 프로 야구가 창설된 이후 부산은 한국 야구의 확실한 중심 무대가 되었다. 프로 야구 역사상 첫 한 시즌 100만 관중을 돌파하는 등 한국 프로 야구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부산 사직 야구장은 한국 야구의 메카로 불릴 정도가 되었으며, 사직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는 프로그램이 관광 상품이 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부산을 연고로 삼은 롯데 자이언츠는 프로 야구 최고 인기 구단이라는 부수입을 올릴 정도였다.

프로 초창기 스타들은 대부분 실업 야구에서 넘어온 선수들이었다. 지도자들도 실업 야구 코치, 감독을 하던 사람들이 프로를 맡았다. 프로 야구 초반 상당수 팀의 지도자들이 부산 출신이었다.

1. 롯데 자이언츠 초대 감독 박영길

롯데 자이언츠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초대 감독 박영길이다. 박영길은 경남고등학교에서 1루수로 활약하였고 동아대학교를 나왔다. 한국전력에서 장순조, 배만호, 정연회, 박인규, 이철화 등 부산 출신 선수들과 팀을 이뤄 활약하였다. 1982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 창단 감독을 맡았고, 이후 삼성 라이온즈와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지냈다. 한때 KNN 야구 해설가로 활약하였고, 『스포츠 서울』 객원 기자로도 일하였다. 다음은 박영길이 2011년 프로 야구 출범 30년을 맞아 『부산 일보』와 한 인터뷰 내용이다. 이 기사를 통해 박영길은 프로 야구 출범 초창기 분위기를 상세히 전한다.

1982년 프로 야구 출범 당시 롯데 자이언츠 창단 사령탑을 맡은 박영길 전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프로 야구가 성공할 줄 알았지. 출범할 때부터 예견하였던 일이야.” 그는 프로 야구의 성공은 이미 예견된 일임을 강조하였다.

성공의 열쇠는 지방색이라고 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끼치던 지방색이 프로 스포츠에서는 팀에 대한 애정으로 탈바꿈하면서 성공적인 정착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 박 전 감독은 “구단이 지역을 연고로 창단하면 당연히 지방색이 나타난다. 1~2년만 지나면 지방색이 팀에 대한 사랑으로 변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였다.

프로 구단이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던 것도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프로 야구는 전국적으로 골고루 연고지를 두면서 지방색이 뚜렷해 성공할 수 있었다. 출범 당시 일본 프로 야구 구단주들이 한결같이 한국 프로 야구의 성공을 예견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롯데 자이언츠가 부산, 경상남도를 연고로 결정하는 데는 약간의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 부산 등 지방보다는 서울을 연고지로 선호하였기 때문. 박 전 감독은 “당시 신 회장이 구단 연고 문제를 두고 중앙과 지방을 저울질하였는데 결국 마지못해 부산을 택하였다. 이 때문에 롯데 자이언츠는 6개 구단 중 가장 늦게 창단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현재 부산 시민들의 롯데 자이언츠 사랑을 보면 롯데 자이언츠가 부산에 연고를 둔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알 것”이라고 말하였다.

박 전 감독은 부산 팬들의 야구 열정은 옛날부터 정말 대단하였다고 회상하였다. 프로 야구 출범 당시 부산 시민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대구와 서울, 인천 시민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굉장하였다는 것.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시민 환영식에는 수많은 야구팬들이 몰려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부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부산 시민들은 광복 이후 라디오 등 전파를 타고 일본 야구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를 거쳐 손자로 이어지는, 대를 잇는 야구 사랑이 가능해졌다. 부산고등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경남상업고등학교 등 부산 지역 고교 야구부가 잇따라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의 경쟁 구도가 부산을 야구 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박 전 감독은 1984년 삼성의 ‘봐주기’ 시합이 프로 야구 30년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그해 전기 리그를 우승한 삼성이 만만한 롯데 자이언츠와 한국 시리즈를 벌이기 위해 후기 리그 때 져 주기 시합으로 롯데 자이언츠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하는 바람에 삼성은 망신만 샀다.”고 말하였다. 이를 계기로 ‘야구는 해 봐야 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구단들이 야구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박 전 감독은 “야구인으로 한평생 살아간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 야구가 앞으로도 영원히 발전하기를 기원한다.”며 환하게 웃었다.[『부산 일보』 기사 중]

2. 한국 시리즈 우승 주역 강병철

야구 도시로 불리는 부산 야구팬들의 절대적 성원을 등에 업은 롯데 자이언츠는 1985년 한국 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사령탑은 강병철(姜秉哲)[1946~ ] 감독이었다. 강병철은 1992년에도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강병철은 대신중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유격수로 활약한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4년 청룡기 우승 트로피를 모교에 바쳤다.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크라운맥주에서 실업 선수 생활을 시작한 강병철은 해병대에서 3년간 활약한 뒤 한일은행에 입단해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렸다. 국가 대표 팀에서는 박영길, 김응용과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였다.

1977년 동아대학교 감독을 맡았던 강병철은 1982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갔다가 이듬해 감독 자리에 올랐다. 강병철은 1984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롯데 자이언츠를 한국 시리즈 정상에 올렸다. 역시 『부산 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우승 당시 분위기를 잠시 들여다보자.

그는 자신이 운이 좋은 감독이라고 말하였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는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에 비할 전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잘 싸워 줬습니다.” 강 감독은 우승의 공을 선수들에게 돌렸다.

1984년 프로 야구는 실업 야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수의 분화도 이뤄지지 않았을 때였다. 선수층이 두껍지 못해 한두 명 선수에게 팀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그의 행운은 바로 최동원이었다. “당시에는 최동원 말고는 답이 없었지. 중요한 순간에는 결국 최동원이었어요.”

강 감독은 그해 삼성의 져 주기 경기 덕분에 후기 리그서 우승하였을 때만 해도 한국 시리즈에는 거저 진출한 느낌이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서울서 한 번 뛰어 보고 싶었죠. 하지만 7차전까지 가고 보니 욕심이 생겨서……. 무지무지 고생하며 갔으니 선수들도 그렇지만 나도 우승하고 싶었죠.” 8회 김용희(金用熙), 김용철(金用熙)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유두열(柳斗烈)이 타석에 들어섰다. “유두열이 ‘홈런이구나’ 라고 느낄 정도의 타구를 쳤죠. 그때 이겼다고 생각하였어요. 안 바꾸기 잘 하였다고 생각하였죠.” 그렇게 강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에 첫 우승을 선물하였다.

강 감독은 1992년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염종석(廉鍾錫), 박동희(朴東熙), 윤학길(尹學吉) 세 명의 완투 능력이 있는 투수가 떡하고 버티니 단기전에는 강하였죠. 그리고 윤형배(尹炯培)처럼 깜짝 활약을 해 주는 선수가 있었고. 우리 선수들은 젊고 패기가 넘쳤습니다. 김민호(金旻浩), 전준호(田俊鎬), 박정태(朴正泰), 윤형배 같은 선수들의 수준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는데 빙그레는 그걸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빙그레는 방심하였고 기세 오른 젊은 롯데 자이언츠는 무서웠습니다.”

그는 아직 많은 구단이 야구를 홍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메이저 리그처럼 경영 마인드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삼성과 롯데 자이언츠처럼 대규모 투자를 하는 구단도 있고, 넥센처럼 유망주를 중심으로 선수를 키워 내는 구단도 필요합니다. 넥센 규모의 팀이 늘어나면 10구단도 가능하죠. 선수들은 성장할 기회를, 구단은 이윤을 남길 기회를 동시에 갖는 겁니다. 이로 인해 프로 야구 저변이 넓어지는 것 아닐까요.”[『부산 일보』 기사 중]

그러나 강병철은 ‘선수 혹사’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단 지도자이기도 하다. 1992년 한국 시리즈에서 두 번째 우승할 때 당시 신인이었던 염종석을 혹사시켜 결국 선수 생명을 일찍 마감하게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3. 최고 투수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 주역은 역시 최동원이었다. 최동원은 한국 시리즈에 5번 등판해 4승을 따내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를 거쳐 1981년 실업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최우수 선수[MVP]와 다승왕·신인왕을 휩쓸었다. 이후 프로에 뛰어든 최동원은 1984년 27승 13패 6세이브에 223탈삼진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최우수 선수가 되었다.

1990년 은퇴한 최동원은 이듬해 지방 의회 선거 때 부산광역시 서구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이후 방송사 해설 위원, 라디오 쇼 진행자, 시트콤 배우 등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1년 한화 이글스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하였고, 2006년부터 3년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지냈다. 『부산 일보』에 실린 최동원의 기사를 한 번 살펴보자.

프로 야구 제9구단 엔씨소프트 김택진 구단주는 최근 창단식에서 롯데 자이언츠 투수였던 최동원 씨를 자신의 영웅이라 하였다. 그는 학창 시절 최동원을 보면서 이 세상의 영웅상을 알게 되었고, 야구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하였다. 최동원이 야구 선수를 꿈꾸던 한 소년을 구단주로 만든 셈이다.

최동원은 프로 야구 30년사, 아니 한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그는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뒤 8시즌 동안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를 기록하였다. 평균 자책점 2.46과 탈삼진 1,019개를 보유하고 있다. 최동원의 성적은 통산 기록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거의 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짙은 향수를 느끼고 있다.

왜일까. 그는 기록과 관계없이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 투수였기 때문이다. ‘1984년 한국 시리즈 기적’이라는 강렬한 추억도 있다. 그는 당시 7전 4선승제의 한국 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약체 롯데 자이언츠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해 정규 시즌에는 27승으로 다승왕에 올랐다.

최동원은 “당시 강병철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무리가 있겠지만 하는 데까지 해 보자’고 하였다. 나도 우승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1, 3, 5, 6, 7차전 등 5차례 등판하였는데 이 가운데 4승을 거뒀다.”고 회상하였다.

최동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고교 때부터였다.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우수 고교 초청 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인 경북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다. 다음 경기인 선린상업고등학교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 노런 투구를 이어가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최동원은 1977년과 1981년 두 차례 일본과 미국 메이저 리그 진출을 시도하였지만 병역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그는 데뷔 첫해 9승 16패를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부상 후유증에 시달렸던 데다 팀 전력이 약하였던 것이 문제였다. 여기에 프로 야구 출범 2년째를 맞으면서 타자들의 기량이 향상된 점도 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데뷔 2년째인 1984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27승 13패 평균 자책점 2.40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한국 시리즈에서만 기적의 4승을 거두며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그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1987년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였고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부산 일보』 기사 중]

최동원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경기가 있다. 1987년 프로 야구 사상 최고 명승부로 불리는 경기였다. 최동원 대 선동열(宣銅烈)[해태 타이거즈]의 맞대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투수는 15회 연장까지 완투하는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최동원은 살아 있을 때 “선동열과 세 번 맞대결을 펼쳐 1승 1패 1무를 기록하였다. 선동열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고 회상하였다.

최동원은 1988년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야구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였다. 최동원은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김대현 투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최동원은 선수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의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의회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해 11월 최동원은 삼성 라이온즈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하였다. 최동원은 199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최동원은 “당시 구단들은 프로답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구단과의 앙금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최동원은 2011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부산 야구팬들이 그의 롯데 자이언츠 감독 취임을 기대하였지만 결국 그 염원을 이뤄주지 못하고 만 것이다. 부산에서는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되던 2013년 9월 14일 최동원 동상이 세워졌고, 이후 최동원기념박물관 건립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만큼 최동원이 부산 야구, 아니 부산 시민들에게 남긴 족적은 컸다.

4. 최연소 감독 김용희

최동원과 필적할 만한 롯데 자이언츠의 타자 스타로는 김용희[1955~ ]가 있다. 김용희는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스타이다. 동광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해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거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강타자로 이름을 날리다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고, 경리단[육군]과 포항제철 등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김용희는 198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서 베스트 나인[3루수]에 뽑혔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김용희는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를 맡았다. 김용희는 외모처럼 성격도 유순하고 차분하였다.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하였다. 그 당시 선수들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김용희는 1982년과 1984년 두 번의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상 수상으로 팬들에게 ‘미스터 올스타’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쾌한 타격이 초창기 야구팬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김용희는 1994년 야구 인생에 있어 또 한 번 전환기를 맞는다. 바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선임된 것이다. 당시 김용희의 나이는 38세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출신 선수로서 첫 프로 야구 감독이자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감독이었다.

5. 초대 미스터 올스타 김용철

김용희를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있다. 김용희와 같은 시기에 강타자로 활약한 김용철[1957~ ]이다. 김용철은 동광초등학교와 대신중학교와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한일은행에 입단한 김용철은 1982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가 되었다. 이후 11시즌 동안 통산 1,024경기에 출전해 홈런 131개, 타점 555점, 타율 0.283을 기록하였다. 1982년 7월 올스타전에서는 홈런 세 개를 날리기도 하였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에는 삼성 라이온즈 타격 코치, 현대 유니콘스 코치, 롯데 자이언츠 수석 코치와 감독 대행을 지냈다.

김용희와 김용철이 언제나 나란히 거론되는 것은 올스타전 때문이다. 다음은 『부산 일보』가 보도한 사연이다.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처음 열린 올스타전이었다. 당시 6개 팀을 동군[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오비 베어스]과 서군[삼미 슈퍼스타즈,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으로 나눠 부산[7월 1일], 광주[3일], 서울[4일]에서 경기를 치렀다. 팬 인기투표로 20명을 뽑은 뒤 감독 추천까지 더해 팀마다 30명을 선발하였다. 요즘 선발방식과 비슷하다.

첫해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상을 두고 롯데 자이언츠의 집안싸움이 벌어졌다. 김용희와 김용철이 홈런 경쟁을 펼친 것. 3일 광주에서 열린 2차전에서 김용희가 1회 2점 홈런을 치자 김용철은 3회 솔로포와 5회 2점포로 맞받아쳤다. 김용희가 8회 솔로포로 다시 균형을 맞추자 바로 뒤에 나선 김용철은 기다렸다는 듯 연속 타자 홈런으로 응수하였다. 김용희는 “그때만 해도 다들 MVP는 김용철이 탈 줄 알았지.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회상하였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서울 동대문 야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 김용철은 더 이상 홈런을 터뜨리지 못하였다. 반면 김용희는 7회 무사 만루에서 MBC 청룡 유종겸 투수를 상대로 만루포를 날려 버렸다. 이 홈런 한 방은 그를 초대 미스터 올스타로 만들었다. 김용희는 “홈런을 치는 순간 정말 짜릿하였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부산 일보』 기사 중]

6. 최고의 명장 김응룡

프로 야구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명장이 있다. 바로 김응룡[1941~ ]이다. 김응룡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지만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와 성지초등학교, 개성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우석대학교 시절 국가 대표 팀 4번 타자로 활약하였으며, 196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2점 홈런을 날려 한국에 우승을 안겼다. 이후 실업 야구에서 1965년과 1967년에 홈런왕에 올랐다. 1973년 한일은행에서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취임해 첫 해 한국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모두 10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김응룡이 감독 자리에서 은퇴하자 『일간 스포츠』는 김응룡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렸다.

한국 시리즈에서 무려 10번이나 우승 트로피를 안은 김 감독은 한국 프로 야구사의 산 증인이다. 출범 후 4반세기 가깝게 흘러온 한국 프로 야구는 김응용이라는 이름 석 자를 거론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였을 때 김응룡 감독은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 야구 유학 중이었다. 현역으로 뛰던 한일은행 시절 국가 대표 4번 타자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국가 대표 감독을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에게 감독 제의가 올 법도 하였으나 단 한 팀도 그에게 감독을 맡아 달라고 연락한 구단이 없다고 한다.

김 감독은 훗날 원년에 단 한 팀도 감독을 맡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하였다고 하며 프로 야구 개막전도 몰래 귀국해서 지켜봤다고 말하였다.

1982년 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 감독을 영입하는 행운을 잡은 팀은 해태 타이거즈. 전기 리그가 시작한 지 1개월여 만에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고 조창수 대행 체제에 있던 해태 타이거즈의 정기주 단장은 김 감독에게 “박건배 구단주가 김 감독을 원한다.”며 팀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고 김 감독은 흔쾌히 승낙하고 1983시즌부터 해태 타이거즈 벤치를 지켰다.

김 감독은 심판 판정에 강하게 어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로는 육탄전도 불사하는 그의 불같은 성질이 처음 표출된 것은 1983년 6월 14일의 대전 구장 심판실 난입 사건. 김 감독은 이날 오비 베어스전 직후 심판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김옥경 구심을 구타하였다. 폭행 혐의로 경찰에 입건 된 김 감독은 KBO의 중재로 벌금 100만 원을 물고 풀려났다.

김응룡 감독은 200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 한국 시리즈 우승 염원을 풀어 줄 청부사로 삼성 라이온즈로 둥지를 옮겼다. 그는 2002년 마침내 삼성 라이온즈를 한국 시리즈 첫 정상에 올려놨다.

김 감독은 부임 후 삼성 라이온즈 특유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타파하고 스타플레이어들과 구단 프런트들을 휘어잡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 ‘모래알 야구’를 한다는 삼성 라이온즈를 끈끈한 승부 근성을 가진 팀으로 변모시켰다.[『일간 스포츠』 기사 중]

7. 롯데 자이언츠 감독 김명성

롯데 자이언츠 감독 이야기를 하면서 김명성(金明成)[1946~2001]을 빼놓을 수 없다. 김명성은 1960~1970년대 부산 야구를 전국 정상으로 끌어올린 초대형 스타 출신으로 프로 야구에서도 감독 생활 3년 동안 팀을 두 번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킨 명장으로 손꼽힌다. 부민초등학교, 경남중학교에 이어 부산공업고등학교를 거쳐 동아대학교를 중퇴한 김명성은 선수 시절 1963년 청룡기 고교 야구 최우수 선수, 1968년 전국 실업 야구 MVP, 1970년 다승왕 등 숱한 수상 경력을 남긴 대형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코치로 프로 야구에 첫 발을 디딘 김명성은 방송 해설 위원과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의 코치를 거친 뒤 1998년 6월 롯데 자이언츠 감독 대행을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김명성은 1999년에 롯데 자이언츠를 한국 시리즈 준우승, 2000년에 매직 리그 2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김명성은 2001년 성적 부진에 허덕이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 야구 역사상 현역 감독이 재임 중 숨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성득(李成得) 야구 해설 위원은 ‘짧은 기간에 뛰어난 성적을 남긴 뛰어난 지도자’였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간성 좋은 선배’였다고 김명성의 사망을 아쉬워하였다. 김명성의 사망은 한국 프로 야구 20년 역사상 현역 감독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로 프로 야구 감독들의 정신적 압박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잘 보여 줬다.

8. 스타 해설가 허구연

프로 야구는 스타 선수, 지도자뿐만 아니라 스타 해설가도 낳았다. 바로 허구연(許龜然)[1951~ ]이다. 허구연은 경상남도 진주 출생이지만 어릴 때 부산에 이사를 와 대신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하였다. 경남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바로 4번 타자를 맡아 1971년 대학 야구 연맹전에서 홈런왕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76년 한일 실업 야구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은퇴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허구연은 동아방송에서 야구 해설을 하다가 1982년 프로 야구 출범 이후 MBC에서 본격적으로 야구 해설가 일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다음은 『부산 일보』에 나온 인터뷰 기사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MBC에서 연락이 왔다. ‘곧 출범하는 프로 야구 해설을 맡아 달라.’ 이전에 가끔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야구 해설을 하였다. 그 모습을 눈여겨 본 MBC 측에서 해설가 자리를 제안하였던 것. MBC에서 1회 해설에 3만 6500원을 주겠다고 하였다. 처가에서 반대가 심하였다. 그냥 있으면 대학 교수가 될 텐데 왜 야구 해설가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야구 해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시절이었다.

프로 선수처럼 연봉제로 하자고 역제안하였다. 연봉은 당시 프로 야구 최고 선수 수준과 맞먹는 2200만 원을 달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MBC와 협상을 한 끝에 연봉 1400만 원을 받기로 하였다.

당시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프로 야구를 중계하였다. 매일 밤에는 프로 야구 하이라이트에 출연하였다. 라디오를 통해서는 날마다 해설을 하였다. 힘들고 바쁜 나날들이었다.

처음 시도한 것은 일본식 야구 용어를 바꾸는 것이었다. 포볼, 데드볼 등을 볼 넷, 몸에 맞는 공 등으로 변화시켰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던 MBC 프로듀서 등을 끈질기게 설득시켰다. 지금 못 바꾸면 절대 못 바꾼다고 이야기하였다. 유도는 일본어로, 태권도는 한국어로 용어가 되어 있다. 야구는 영어를 써야 한다. 아니면 제대로 된 우리말로 번역하든지라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맨 처음 방송을 통해 바뀐 용어를 사용하자 야구판에 난리가 났다. 야구인들은 물론 다른 방송사에서 비난 발언을 쏟아 냈다. 허 위원장의 변화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뒀다. 그의 길이 옳았기 때문이다.

1984년 미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스프링 캠프가 열리던 미국 베로비치로 갔다.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토미 라소다 감독 등으로부터 미국 야구를 배웠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 야구는 완전히 시골판이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투수가 경기를 치르고 나면 목욕탕에서 온탕에 들어가는 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들은 얼음으로 팔을 감싸는 이른바 ‘아이싱’을 하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부상 야구 선수 수술로 유명한 프랭크 조브 박사가 얼음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줬다. 돌아와서 우리나라에도 아이싱을 보급하였다.”[『부산 일보』 인터뷰 중]

9. 편파 해설가 이성득

허구연처럼 전국구 해설가 스타는 아니지만 역시 인기 해설가가 있다. 롯데 자이언츠 중계만을 전담하는 ‘원조 편파 해설가’ 이성득[1953~ ]이다. 이성득은 1998년 7월 11일 부산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현재 기아 타이거즈]전 때 처음 야구 중계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5월 27일 서울 잠실 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대 LG 트윈스전에서 국내 스포츠 사상 처음 2,000 경기 연속 중계 해설의 진기록을 세웠다. 이성득은 “2,000 경기를 중계하였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야구 중계를 한 지 15년이 흐른 지금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하였다.

이성득은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멤버이다. 경남중학교경남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이성득은 실업 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뛰었다. 1970년 제42회 황금 사자기 대회와 1978년 제28회 백호기 대회 타격왕을 차지하였다.

이성득은 프로 야구가 출범한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김재박 전 현대 유니콘스 감독과 김무관 LG 트윈스 타격 코치, 황규봉 전 삼성 라이온즈 투수 등이 이성득의 동기생들이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지 1년 뒤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이후 운영 팀 직원과 전력 분석원 등으로 롯데 자이언츠와 인연을 이어갔다. 1988년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겸 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1997년 외환 위기 한파는 이성득을 다른 인생의 길로 가게 하였다. 구조 조정의 한파가 몰아치자 퇴직을 결심하고 롯데 자이언츠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부산·경상남도 지역 민영 방송인 PSB[현재 KNN]에서 야구 해설가 제의가 왔다. 처음엔 망설였다. 쉰 듯한 목소리가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사투리를 고칠 자신이 없었다. 이성득은 “욕을 먹더라도 해 보고 욕을 먹자.”고 결심하고 해설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설가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공정하지 못한 해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성득은 방송 도중 ‘우리 롯데’라는 말을 연발하였고, 롯데 자이언츠에 유리한 해설로 일관하였다. 급기야 ‘편파 해설’이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사투리와 편파 해설이 오히려 부산 팬들을 열광시킨 것이다. 이성득은 “편파 해설이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라디오 방송이 잘 되지 않은 경상남도 지역 청취자들은 경기 시간에 맞춰 높은 산에 올라가 방송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고 회상하였다.

이성득이 방송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999년 롯데 자이언츠 대 삼성 라이온즈 간의 포스트 시즌이었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외국인 선수 호세는 대구에서 관중이 던진 물병을 맞고 화가 나 들고 있던 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던져 경기가 중단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은 퇴장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주장이던 박정태가 선수들을 다독여 다시 경기에 나서게 되었고, 삼성 라이온즈를 꺾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성득은 “롯데 자이언츠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 준 경기였다.”고 말하였다.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이성득의 애정은 남다르다. 롯데 자이언츠의 부진을 단적으로 보여 주던 ‘8888577 시절[각 숫자는 시즌 순위]’ 이성득은 약을 달고 살았다. 시즌만 마치면 병원에서 약을 타서 아픈 위장을 치료하였다.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이 좋지 않아 화가 나서 생긴 병이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 이후 롯데 자이언츠가 5년 연속 가을 야구에 진출하자 이성득의 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10. 투수 출신 해설가 김소식

허구연, 이성득에 앞서 실업 야구와 프로 야구 초창기에 명성을 날렸던 해설가도 있다. 김소식[1943~ ]이다. 김소식은 부산중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뒤 부산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62년 청룡기에서 정상을 차지해 모교에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안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상업은행에 입단하였고 해병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27세의 젊은 나이에 유니폼을 벗고 경남은행, 국제그룹, 국제종합기계, 논노패션 등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후 야구 해설가로 20년 가까이 일하였고 야구 원로 모임인 일구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투수 출신인 김소식은 야구 해설 중에서도 특히 투수를 분석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약간 탁하면서도 굵은 목소리가 인기의 또 다른 비결이었다.

11. 한국 시리즈 최우수 선수 유두열

이밖에도 롯데 자이언츠에는 스타들이 적지 않았다. 유두열[1956~ ]은 마산동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선수로 활약하였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 팀이 3 대 4로 뒤진 8회 초 역전 3점 홈런을 날려 롯데 자이언츠에 첫 우승의 감격을 안겼다. 유두열은 한국 시리즈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은퇴한 뒤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 코치를 지내다가 군산상업고등학교, 김해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등에서 프로 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을 길러 냈다.

12. 첫 삼진왕 타이틀 거머쥔 노상수

노상수(盧相守)[1958~ ]는 동성중학교와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 투수였다. 1973년 동성중학교 재학 때 제20회 전국 중학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고교생이던 1974년 제29회 황금 사자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뒤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다. 1978년 대학 야구 춘계 및 추계 연맹전에서 각각 정상에 오르며 우수 선수상과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로 프로 야구에 뛰어든 노상수는 프로 야구 원년에 14승을 따내며 탈삼진 141개를 잡아 첫 삼진왕 타이틀을 따냈다. 상무를 다녀온 노상수는 은퇴해 롯데 자이언츠 코치, 부산상업고등학교 감독 등을 지냈다.

13. 5경기 연속 홈런 날린 김민호

김민호[1961~ ]는 1979년 부산고등학교의 전국 고교 야구 대회 2연패의 주역이었다. 제34회 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와 제31회 화랑대기 쟁탈 전국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동국대학교에 진학한 김민호는 1983년 대학 야구 춘계 리그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차지하며 팀에 우승을 안겼다. 그해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마친 뒤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이후 1996년 은퇴할 때까지 1,207경기에 나가 타율 0.278, 홈런 106개, 타점 606개를 기록하였다. 특히 1988년에는 당시 한국 신기록이었던 5경기 연속 홈런을 날렸다. 이후 동의대학교, 부산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롯데 자이언츠 코치 등을 역임하였다.

14. 최다 완투승 기록 세운 윤학길

윤학길[1961~ ]은 동성중학교와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윤학길은 부산상업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9년 제13회 대통령 배 전국 고교 야구 대회 준우승과 감투상, 대학 1학년이던 1980년 제3회 통일대기 대학 야구 대회 우승과 우수 투수상, 상무 시절인 1984년 실업 리그 최다승, 방어율, 최우수 선수상 등 3관왕을 차지하였다.

1986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윤학길은 은퇴할 때까지 총 308경기에 나와 117승을 기록하였다. 그중 100번을 완투하였고, 78승이 완투승이었다. 당시 프로 야구 최다 완투 및 최다 완투승 기록이었다. 은퇴 이후에는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 넥센 히어로즈, LG 트윈스 코치와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15. 1992년 우승 주역 박동희

박동희[1968~2007]는 부산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속 150㎞가 넘는 빠른 강속구를 던지며 1986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4승을 따내며 최다승 투수가 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출전하였다. 1989년 대륙 간 컵 대회에서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1990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1992년 우승 주역이 되었다. 부상에 시달리다 1997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지만 곧 은퇴하였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개인 기업체 등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6. 흔들 타법 박정태

박정태[1969~ ]는 동래고등학교경성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1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92년, 43개의 2루타를 기록해 당시 한 시즌 최다 2루타 기록을 세웠다. 몸을 좌우로 흐느적거리면서 방망이에 왼손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독특한 타격 자세인 ‘흔들 타법’으로 유명하였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 2군 감독 등으로 활동하였다.

17. 신인왕 염종석

염종석[1973~ ]은 부산중학교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92년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첫해 17승을 따내며 신인왕,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더니 포스트 시즌에서도 맹활약해 롯데 자이언츠에 사상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안겼다. 그러나 이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며 신인 때 같은 활약을 펼치지 못하다 2008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뒤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활약하였다.

[부산 갈매기]
다른 프로 구단 투수들이 부산 사직 야구장에 오면 롯데 자이언츠의 화끈한 방망이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있다. 바로 관중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마~’ 소리다. 상대 투수가 롯데 자이언츠 주자를 향해 견제구를 던져 타자와 팬들의 기운을 빼면 부산 갈매기 야구팬들은 어김없이 투수에게 한목소리로 손가락질하며 외친다.

부산 갈매기 야구팬은 화끈하기로 유명하다. 그 열기만큼 아이디어도 넘친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만들어낸 응원 문화는 적지 않다. 구단 버스에 응원 메시지를 처음 남기 시작한 팬들은 부산 사람들이었다. 지난 1992년 롯데 자이언츠가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팬들은 응원하는 마음이 항상 선수들과 함께 있길 바라며 구단 버스에 낙서를 하였다. 이 응원 문화가 부산에서 인기를 얻자 다른 구단은 물론 다른 종목에까지 퍼져 나갔다.

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 틀어 주는 테마 송과 응원가를 따로 만든 것도 롯데 자이언츠가 처음이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문지와 비닐 봉투 응원이다. 이미 우리나라 프로 야구를 넘어 다른 나라에도 유명한 장면이 되었다. 일본의 한 여행사는 사직 야구장 응원을 패키지여행 코스로 포함하기도 하였다.

부산 팬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롯데 자이언츠 응원단장의 인기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롯데 자이언츠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는 조지훈은 여느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조지훈은 “다른 구단 응원단장들도 다 유명하다. 다만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많아서 좀 더 알려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조지훈은 “워낙 팬이 많고 열정이 넘쳐서 서울이든 어디든 한 번도 응원에서 밀린 적이 없다.”며 롯데 자이언츠 팬의 열정을 평가하였다.

응원단장의 인기가 이 정도니 선수들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주장 홍성흔과 가수 비[정지훈]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비는 월드 스타 대열에 오른 인기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부산 팬들은 비를 제쳐 두고 홍성흔에게만 사인을 부탁해 비가 머쓱해졌다는 일화도 있다.

때로는 전국 최고의 열정이 어긋나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일부 팬들 때문에 ‘꼴데’[꼴찌를 하던 시절의 롯데 자이언츠의 별명]와 ‘훌리건’[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을 합쳐 ‘꼴리건’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2009년 5월 6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대 SK 와이번스전 도중 익사이팅 존에 있던 한 팬이 칼을 휘두르며 박재홍에게 다가왔다. 이 경기에 앞서 4월 23일 김일엽과 빈 볼 시비가 붙었던 박재홍은 롯데 자이언츠 팬에게 미운 털이 잔뜩 박혀 있었다. 경기장에 난입한 팬은 경호 요원들의 제지를 받자 박재홍에게 칼을 던졌다. 다행히 그 칼은 장난감이었다.

프로 야구 초창기에는 상대 선수단 버스를 에워싸고 길을 막는다든가 경기 도중이나 경기 종료 후에 관중이 운동장에 집단으로 난입해 행패를 부리는 일이 더러 발생하였다.

부산 야구팬들의 성원은 프로 야구 이전부터 유명하였다. 부산 구덕 야구장에서 고교 야구가 열릴 때는 관중을 제대로 통제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고교 야구는 하루에 서너 경기가 열렸다. 과거 부산야구협회는 한 경기가 끝나면 관중을 모두 내보낸 뒤 다음 경기 관중을 새로 받아 경기를 치렀다. 그래도 경기 때마다 야구장은 관중으로 꽉꽉 들어찼다는 게 야구 원로들의 회고다.

[부산 야구의 미래]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아마추어 야구의 인기가 떨어졌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롯데 자이언츠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부산 아마추어 야구도 위기를 맞았다. 팀 수는 날로 줄고, 야구를 하려는 어린 선수들도 찾기 힘들었다. 선수가 모자라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팀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가 다시 인기를 회복하면서 부산 아마추어 야구도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리틀 야구팀의 급성장은 아마추어 야구에 큰 힘이자 재산이다. 이들이 성장해 중고교 야구 선수로 진학하면 선수층이 두꺼워지고 선수들의 실력도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부산광역시에서는 기장군에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유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산 야구는 표면적으로는 발전의 계기를 맞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설이다. 부산에는 야구장이 정규 구덕 야구장과 사직 야구장 밖에 없다. 둘 다 너무 낡아 앞으로 10년 이내에 고치거나 뜯어야 할 형편이다. 부산광역시에서는 이 문제를 고려해 새 야구장을 짓는 문제를 검토 중이다. 또 롯데 자이언츠는 축구장인 아시아드 주경기장을 야구장으로 개조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이곳을 롯데 자이언츠 홈구장으로 쓰고, 사직 야구장은 아마추어 야구나 프로 2군 경기장으로 활용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다른 문제는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야구를 할 리틀 야구장이 없다는 점이다. 리틀 야구팀은 날로 늘어나는데 리틀 야구장은 고작 강변 공원에 마련된 맨땅 구장 등이 전부다.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더 있다. 부산에는 프로 야구 팀이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넥센 히어로즈, SK 와이번스 등 4개 팀이나 있다. 부산에 프로 야구 팀이 하나 더 생길 필요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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