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의 부산 정착

대표시청각
button
관련항목 페이징
  • URL Copy
  • twitter
  • facebook
항목 ID GC04219017
한자 避難民-釜山定着
영어의미역 Settlements of Refugees in Busan
분야 역사/근현대,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철욱
[부산과 피난민]
부산 사람들이 6·25 전쟁을 기억하려는 이유는 뭘까. 6·25 전쟁기 임시 수도 부산은 약 1,000일 동안이지만 두 가지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권력을 유지해야 했던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하는 사람들, 예술하는 사람들, 돈 자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부모 형제, 고향과 억지로 헤어져 갈 곳 없어 안전지대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의 생존 경쟁장이었다. 이때만큼 부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경험한 적도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행세께나 하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자 미련 없이 부산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고생한 곳, 생각도 하기 싫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곳 없던 피난민들은 부산에 남아 살기 위해서라도 파괴와 혼란의 도시를 지금처럼 바꾸면서 악전고투하였다. 그런데 역사는 힘 있는 사람들의 임시 정부만 기억할 뿐 정작 오늘의 부산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했다.

전쟁 직전 약 40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전쟁이 끝나자 약 1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증가한 인구는 부산 토박이보다 전쟁 때문에 이북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피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생소한 부산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를 썼다. 특히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는 낯설고 막다른 장소였다. 그렇다고 부산이 이들을 따뜻하게만 감싼 것은 아니었다.

피난 온 식구들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부족했고, 마실 물이 없어 잠겨 진 수도꼭지 앞에 양동이를 세워놓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일어나는 화재는 피난민들이 가진 것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 등짝에 붙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밥을 얻어먹으러 다녀 보기도 하고, 장사도 하고,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염치고, 체면을 내세울 일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법을 어겨 가면서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한마디로 악착같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절박함이 오늘의 부산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 세대가 누리는 부산의 대부분은 피난민들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고, 피난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피난민들이 부산을 만들어 오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해서, 부산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만이 고향을 등지고, 부모 형제와 헤어져 고통의 한평생을 살아오면서도 오늘의 부산을 만든 그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그동안 기억되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 쓰기란 부산을 만든 주인공이라는 훈장을 붙여주는 작업이다. 많은 부산 사람들로 하여금 피난민들의 경험을 공유하게 해서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받은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갑작스런 피난길]
부산에 처음 도착한 6·25 전쟁 피난민은 1950년 6월 28일 오후 전방의 군인 가족들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 개입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1차 피난이라 하고, 그 이후를 2차 피난이라 한다. 정부나 군에서는 피난민들을 피난시키기 위한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피난민은 1·4 후퇴 이후 이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이었다. 이들의 부산행은 그다지 순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날 것처럼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11월말 이후 갑작스럽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마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후퇴하는 군인들과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상을 함께하던 부모 형제나 고향 마을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하염없이 걸어서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도 건너면서 남으로 향하는 부류가 있었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피난 도중 함께 강을 건너던 옆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갔다. 한 달이고 두 달을 걸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안도에서 피난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진남포나 해주에서 배를 타는 경우도 많았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군 수송선인 LST선을 탔다. 피난민들에게 영어 발음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LST선이라고 분명히 기억한다. 그만큼 당시에는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틈에서 뱃멀미를 해 정신을 잃어도 피난만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 배를 탄 사람들은 대체로 인천이나 군산에 피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곧바로 부산으로 오기도 하였다. 서북 지역 피난민 가운데 기차를 타고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기관사가 친인척인 경우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타고 올 수 있었다. 복잡한 피난행이어서 요강을 챙겨오면서 사용했던 피난민도 있었다.

함경도 피난민들은 원산이나 흥남 부두에서 대부분 출발해 왔다. 대체로 부두 주변 사람들이 많았으나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사람들도 적의 추격을 따돌리면서 피난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배를 탈 때 피난 오는 식구가 함께 탈 수 있었으면 다행이었는데, 너무 복잡하여 한 순간에 헤어지면 끝장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피난을 고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이들만이라도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LST선을 타고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간혹 동해안에서는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많아 자기 배를 이용해 많은 식구와 먹을거리를 싣고 내려오는 피난민도 더러 확인되었다. 원산이나 흥남에서 출발해 동해나 포항, 울산에서 첫 피난 경험을 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많이 간 곳은 거제도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거제도 장승포, 구조라, 지세포, 연초, 둔덕, 성포, 장목 등에 흩어져 새 삶터를 만들었다. 이곳의 많은 피난민들은 종전 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피난 생활을 계속하였다.

힘들게 피난한 피난민들이 꿈에 그리던 부산에 도착해서는 더 커다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 도착했다고 피난민들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살고 있는 수도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당시의 사고로는 소위 사상적으로 깨끗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피난민들 가운데 특히 평안도 출신자들은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사상 검증을 받아야만 했다.

피난 이전 이북에서 노동당 활동을 했는지, 아니면 인민군에 의해 학대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미군들이 관리하는 포로수용소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위협적이었다고 기억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심사 과정에서 노동당 경력이 발각되어 다시 포로수용소에 감금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포로수용소의 포로 분류 가운데 ‘민간인 억류자’들은 이러한 부류들이었다. 함께 내려온 친인척 가운데 심사 과정에서 감금된 피난민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장 살길이 막막해 조금 덜 아픈 것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였다. 가족이라도 함께 왔으면 다행이었으나, 혼자서 멋모르고 내려온 피난민은 살길이 막막하였다. 함께 힘이 되어줄 울타리가 없었다. 남자들 가운데서 이북에서 결혼했으면서 혼자 내려온 경우도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결혼을 조금 서두르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혼자 내려온 남자들의 경우 나이 차가 조금 많이 나더라도 이북 여자들과 결혼하는 풍습도 생겼다.

[피난민과 판잣집]
1950년 6월 28일부터 피난민들이 들이닥쳐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정부로서도 기껏 피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쟁 직전 약 47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가 1·4 후퇴 이후 약 84만여 명 정도로 급증하였다. 이 보다 더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오고 싶었으나 정부의 부산 유입 제한 조치로 제동이 걸렸다. 그렇지만 백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부산은 일제 강점기 약 30만 명이 생활할 수 있는 도시에 불과했다.

부산시와 정부는 급한 대로 피난민이 생활할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였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인 극장, 공장 등을 차출하였다. 남구 적기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소[牛] 수출 검역소,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합쳐도 7만 명가량 수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부 장관이나 경상남도 지사, 부산시장은 여관, 요정, 적산 가옥 등도 피난민을 수용하도록 매일 매일 언론에다 동참을 호소하였다.

운이 좋아 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았으나 그렇지 못한 대부분 피난민들은 자신이 직접 주거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신세지는 것이 별일 아니었으나 아무 연고가 없으면 모든 게 낯설었다. 비싼 방세가 문제였는데 그나마도 방 한 칸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물가나 여관비, 집세를 올리는 원주민들에게 동족애를 발휘하자는 도지사의 담화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살길을 차자서 남하한 피난민들이 정부가 제공하는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수용되지 안흔 사람들은 한 칸 방을 구하여 방황하던 곳에 여기저기 공지에 간이 주택인 바라크[판자촌의 깡통, 판자 등으로 지은 막사를 일컫던 당시 명칭]를 지어 초막(草芥)과 같은 슬픈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버림받은 이들 앞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생명의 위협이 닥쳐왔다. 즉 현재 부산 시내에 공방(空房)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공방을 조사하여 입주 알선의 성의와 능력이 없으며 무서운 고액의 방세를 착취하고 있는 부산 집주인들에게 양심의 권고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또 한랭의 가두를 방황하다 못해 발견한 공지에다가 눈물야린 피와 땀의 바라크를 세우는 당시에 이를 방지하지 아니하고 방임한 때문에 이미 바라크는 수만 생명의 보금자리화 하였고 또 재산화한 오늘에 와서 부산시 당국은 돌연 전 시내의 바라크를 일제 철거할 계획을 실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동아 일보』, 1951. 4. 13]

합법적으로 주거 공간을 마련할 수 없자 많은 피난민들은 빈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이 짓는 판잣집은 국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두를 배경으로 한 부두 주변,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바닷가 주변인 태평동, 보수천을 중심으로 한 보수 공원과 충무동 해안가 등에 집중하였다. 이곳은 정부나 부산시 소유지가 대부분이었고, 지대를 지불하기도 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원주민들이 이곳에다 판잣집을 짓고 임대료를 받기도 하였다.

판잣집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몇몇 기록에 조사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져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철거와 설치를 쉽게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황 파악이 힘들다. 간접적인 증빙 자료로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1953년 10월 현재 도로변과 하천변에 2만 2000호, 산마루에 1만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료에 의하면, 1953년 7월 4일 당국이 조사한 판잣집이 2만 8619호였는데, 다소 규모가 큰 판자촌을 보면 영주동 산기슭에 약 1,000호, 영도 대교로 해안가에 약 700호, 보수동에 약 600호, 송도에 약 300호, 국제 시장에 약 1,200호였다고 한다. 제3, 4부둣가에도 적지 않은 판잣집들이 있었다. 평지이면서 빈터에는 대부분 판잣집이 있었다고 보는 게 규모를 가늠하기 편하다.

판잣집의 환경은 열악했다. 재료가 판자 부스러기나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박스로 만든 것이었으니 겨울이면 바람을 막을 창문도 온전치 않아 바람이 들이치고, 바닥은 가마니로 장판 삼고, 온기래야 피워 놓은 석유 등불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영주동 같은 산비탈의 경우에는 교통 문제, 위생 문제, 상수도 문제 등이 피난민들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이런 불편한 판잣집에서라도 가족들이 잘 지낼 수 있으면 좋았다.

판잣집도 제 집이라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것도 없으면 다리 밑에서도 많이 생활하였다. 주로 보수천에 만들어진 다리 아래에 걸게를 만들어 혼자 잠자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비가 적게 오는 겨울이나 건기에는 위험하지 않았으나, 장마철이나 여름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갑자기 불어난 물에 쓸려 내려 갈 우려도 있었다. 움막을 지어 사는 경우도 있었다. 땅을 조금 파내고 각목이나 합판을 벽으로 만들고 가마니를 깔아 집을 만들었다.

피난민들이 만드는 판잣집은 크지 않았다. 한 가족이 6.6㎡~9.9㎡[2~3평]의 공간만 있어도 충분했다. 만들 수 있는 재료가 귀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땅 욕심도 내지 않았다. 이웃에 다른 피난민이 오면 자신의 땅을 내어주는 미덕도 있었다. 고향에 대궐 같은 집들을 두고 내려온 피난민들에게 이런 주거 시설이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쟁 탓으로만 돌릴 뿐이었다.

[화재와 철거 공포]
6·25 전쟁 당시 부산을 대표하는 말 가운데 ‘났다하면 불’이라는 말이 있었다.6·25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료로 확인되는 화재 가운데 1950년 11월 24일 영도 대한도기회사 피난민 수용소 화재가 처음이다. 1952년 1년간 화재 490건에 피해액 355억 원에 이를 정도였으니, 당시 화재는 피난민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은 판잣집 내 초롱불, 촛불, 아궁이 불 등이 원인이었고, 겨울의 강풍과 불에 약한 재료, 빽빽하게 들어선 판잣집 등이 피해를 키웠다. 화재는 피난민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1953년 11월 일어난 부산 역전 대화재로 그동안 모은 재산을 모조리 잃게 된 어느 피난민의 자살 이야기는 화재가 피난민에게 준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1953년 1월 30일 발생한 부산 국제 시장 대화재는 피해액 1200억 원에 1,600동의 건물이 전소되어 최고의 피해를 가져왔다.

삽시간에 국제 시장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근이 그야말로 무서운 불바다로 화하게 되자 광복동과 대청동 거리는 「보따리」를 메코 아해를 찾는 사람 땅을 치고 대성통곡하는 사람 마치 미친 사람과도 같이 춤을 추면서 우왕좌왕하는 남녀 경찰관과 헌병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불바다 속으로 띠여 들어가려는 사람 등등 문짜 그대로 대혼잡의 일대 수라장이 생지옥처럼 전개되었으며 거리에는 과자 밀가루 포목 등등 불에서 건저 낸 상품들로 범람하였어도 어떤 사람은 응급실에 문(門)짝을 「다다미」를 메고 나오는가 하면 그래도 권세와 돈 있는 사람은 「추럭(트럭)」으로 짐을 실어 나로는 등 이 수라장 가운데에서도 고르지 못한 사회상까지 였볼 수가 있었다.[『국제 신보』, 1953. 2. 1]

국제 시장 대화재로 인해 재로 변하는 재산을 건져 내려는 상인의 몸부림과 이 틈을 타서 이익을 챙기려는 엇갈린 당시의 분위기를 신문 기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화재 사건이 준 직접적인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이를 빌미로 피난민들이 만들어 온 기반을 빼앗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53년 11월 30일 부산 역전 대화재 이후 시내 중요 건물 소유자들이 부산시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판잣집 철거를 요구한 사례 등에서 화재가 판잣집 철거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화재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철거를 위한 경찰력 등 물리적인 지원을 준비하였고, 부산시에서는 이재민들의 수용소 이전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다. 철거는 복병산, 동광동, 보수천 주변, 해안가 등의 판잣집부터 시작되었다. 1954년 들어서는 초량, 영도, 부산진까지 확대되었다. 철거민들은 스스로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하든지, 아니면 부산시에서 제공하는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피난민들은 부산시의 철거에 대응해 행정 기관이나 국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철거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행정력에 오랫동안 대응할 수가 없었다. 피난민은 부산시가 제공하는영도 청학동, 괴정 새마을, 양정 등의 새로운 마을로 흩어져 들어가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생계 수단과 국제 시장]
피난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생계 문제였다. 수용소 피난민들에게는 일정한 배급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하루하루가 걱정이었다. 6·25 전쟁 중 부산의 직업과 관련한 자료에는 상업, 공무, 자유업이 가장 많았다. 자유업으로는 부두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원조 물자와 무역 때문에 부두 하역 노동이 많이 필요하였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었고, 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수월하였다. 하지만 중간에서 하역업자들의 농간으로 실제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 수준은 낮았다. 그리고 부산역이나 버스 터미널, 시장 등지에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지게꾼들이 대부분 자유업에 해당되었다.

여자들도 적극적으로 노동에 참여하였다. 여자들은 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피난민이 정착하는 마을에서 시장을 열었다. 피난민을 상대로 한 냉면집, 막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꿀꿀이죽 혹은 국수집, 미군복지로 개조한 옷감 장수 등 먹는장사와 입는 장사를 가장 많이 했다. 남편들도 열심히 일을 하면 다행이었으나, 백수 혹은 술주정이 심한 남편을 둔 부인들에게 피난살이는 두 배로 힘든 생활이었다.

장사하는 장사꾼들에게 피난오기 전 신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양반집 며느리가 찐빵을 만들어 팔아야 하루를 살 수 있었다. 남의 공장에 들어가 미싱을 돌리기도 하고, 다림질을 해야만 했다. 법도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가 만들어 놓은 법이지만, 불법으로 돌아다니는 물건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할 판이면 스스럼없이 손을 대었다.

피난민하면 국제 시장이 떠오른다. 물론 국제 시장이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 되었고, 또 부산의 로컬리티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다. 국제 시장은 해방과 동시에 귀환 동포들이 먼저 기틀을 잡았다. 6·25 전쟁 때 서울의 상인들이 대거 집중하면서 큰 시장으로 변화하였다. 점차 이북 피난민들로 세대가 바뀌었다. 국제 시장 상인들의 핵심은 점포 상인, 노점상인, 행상 등 다양하였다. 시장에서 상인들의 위상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달랐다.

1952년 2월에 점포 상인은 1,150명, 무허가인 노점상은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고정 점포의 50%가 월남 피난민, 20%가 서울 피난민이었고, 노점상의 90%가 월남 피난민, 행상인의 95%가 피난민들이었다고 한다. 국제 시장에서 월남 피난민들의 파워를 실감케 한다. 상인들 가운데는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내려온 서울의 상인들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호구지책으로 막연히 장사를 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장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런 기술도 없으면서 남의 기술을 등 뒤에서 보면서 기술을 익혔다. 조금씩 장사꾼이 되어 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국제 시장은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의 생필품 거래장이 되었다.

국제 시장에 나도는 물품은 밀무역품, 미군 용품, 유엔 원조 물자 등 부정 유출품들이 많았다. 당시 부산 유행어 가운데 ‘얌생이 몰러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미군 부대 안으로 염소를 일부러 밀어 넣고는 염소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미군 물품을 훔쳐 나왔다는 뜻이다. 미군 부대 물자는 절도범들의 손에서 몇 단계를 건너뛰어 국제 시장의 상인들에게로 들어갔다. 물론 미군 물자라고 모두 부정 유출품 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에 의해 유통되기도 하였다.

밀수품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밀수입된 것이었는데, 1953년 11월 현재 국제 시장 점포 1,300호 중 휴업 중이던 500호를 제외한 800호 가운데 200호가 밀수품 전문 취급점이었고, 그 외 약 250호가 부분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밀수품 천지였다.

국제 시장은 밀수품의 박람회입니다. 밀수품의 카타로구가 다 있습니다. 국제 시장에 가서 무슨 물건이 필요하다고 하면 3일 후에는 반드시 옵니다. 그만큼 밀수를 하는 사람들의 조직이 꽉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세관보(稅關報)』, 1961. 4. 30]

부정한 방법으로 유통되는 상품이 많았던 국제 시장은 항상 미군 헌병이나 한국 단속반의 검열 대상이었다. 미군 헌병이 단속하고, 상인들은 감추고, 도망치면서 장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물건 사러 온 고객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치도 이들에게는 커다란 무기였다. 설령 경찰의 단속에 걸려 가진 것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다음 날 또 다시 나타나는 상인들의 악착스런 몸부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이 양키 물품을 한 아름씩 안고 다니다가 미군 헌병이라도 만나면 날쌔게 물건을 치마 속으로 넣어 버린다. 북극의 펭귄처럼 배가 뚱둥하다.’ 부끄러움도 사치도 체면도 모두 던져버리고 몸뻬에다 미군 샤쓰의 아낙네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지나가는 손님들의 옷소매를 잡는 것조차 생존을 위한 발버둥 앞에는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은 결탁이었다. 국제 시장 상인들은 조합을 결성하여 단속 반원과 결탁하여 공존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철거할 때 왔다 가서는 또 오는거야 [자기도] 뭐 묵고 살아야지 그러면서 사는거야… 다 그런거라, 형식으로 단속은 하지마는 끝끝내 단속은 다 못하는 거야. 좀 도와 달라 말이야 이러잖아. 자기도 먹고 살아야지. 아 요즘도 [단속] 오게 되면 아 선생님들 좀 도와줘 그러잖아 다. 그런거라 피차 같이 살자 그러고 통하고 마는거라.[이○○ 증언]

국제 시장 상인들의 영업 형태는 합법적인 경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생존이 가장 시급한 상인들에게 국가가 규정한 법적 테두리는 어쩌면 그다지 의미 없었다.

[불편한 피난살이]
피란 생활을 어렵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물’ 사정이었다. ‘밥 한 그릇은 그냥 줘도, 물 한 사발은 줄 수 없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전쟁 당시 부산의 상수도 시설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그대로였다. 인구 30만 명에 맞춰 상수도 시설이 갖춰졌기 때문에 백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꼭지 앞에 물동이를 뱀 꼬리처럼 이어서 세워 놓는 광경은 일상이었고, 수도꼭지 주위에 나무 집을 만들어 열쇠로 채워 놓는 풍경은 부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으면 산동네 사람들은 물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공동 수도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대부분 한 마을에 형편이 나은 사람이 있어 수도가 있을라치면 눈치 보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심 야박한 주인은 문을 걸어 잠그고 피난민과 물을 나누어 먹지도 않았다. 물 사정이 어려울수록 여성들의 노동력 강도는 더 세었다. 아미동 산동네 사는 아주머니는 평소 보수동까지 물동이를 이고 물을 여다 날랐다. 하루 종일 다녀도 몇 동이 안 되었다. 잘못해 가파른 산동네를 오르다가 넘어지는 날이면 까여진 무릎팍이 아프기보다 엎질러진 물 때문에 가슴이 더 찢어졌다. 물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물은 얼마든지 있지요? 물론 있는 곳에 한해서”라는 어느 일간지 만평에서는 귀하신 분들의 물 낭비를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물을 얻고자 주부들의 때 아닌 쟁탈전이 벌어진다. 이 틈을 타서 약삭빠르게 나온 것이 물장수다. “자, 물이야! 물! 한 양철에 5백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이집 저집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마른 사슴처럼 물을 구하려고 뛰어나온다. 오늘도 날씨가 가무니 물장수가 야단이다.[『국제 신보』, 1951. 7. 7]

귀한 물 때문에 물장수 직업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린다는 신문 기사이다.

피난민들을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위생 문제였다.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판잣집들은 점차 산으로 올라갔지만, 겨우 식구들이 잠을 잘 방도 마련하기 힘든 판에 위생 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시 부산시에서도 산동네에 있는 피난민들이 만들어 내는 분뇨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시 의회에서 끊임없이 골머리를 앓았다. 오늘날처럼 산복 도로라도 있었으면 차를 움직여 어찌해 볼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사람들이 다닐 길조차 겨우 만들어져 있었다.

피난민들은 집집마다 화장실을 만들지는 못하고 일정 구역별로 공동 화장실을 만들었다. 우암동에도 10여 개의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공동 화장실은 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청소는 나 몰라라 하는 게 당시의 풍경이었다. 오물이 넘쳐 왕래하는 사람들이 발끝으로 총총거리면서 오물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다녀야만 했다. 간혹 비가 올라치면 쏟아지는 물이 흐르는 계곡에 비와 함께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오물을 버렸다가 비가 그치면오물 냄새로 인한 피해는 적지 않았다.

대청동 위 산마루에서 생활했다는 피난민의 말에 의하면 화장실이 없어 산에다 구덩이를 크게 파서 사용했다고 한다. 어느 날 경찰관이 순시 나왔다가 이 구덩이에 빠져 큰 일이 일어난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었던 공동 화장실은 지금도 피난민들이 살았던 마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 화장실은 오늘날에야 현대식으로 교체되었으나, 여전히 피난 시절의 고통을 기억한 채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곳이 많다.

[피난민들의 인간관계]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관계였다. 여성이냐 남성이냐, 미혼이냐 기혼이냐, 젊은이냐 중년이냐에 따라 사람들과 관계 맺기 방식이 달랐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생계 수단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하였다. 부산진 당감동 피난민 마을에서는 피난민 사이의 취업 알선, 피난민을 상대로 하는 장사, 피난민 경영의 공장 취업 등에서 이북 출신들의 도움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도 피난 온 사람들끼리 자신의 집터를 양보하면서 정착에 도움을 제공하였다.

당감동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마을 내에서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이웃한 친구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갔다. 남자들은 막노동 현장이나 미군 부대 등을 다니면서 경제 활동을 하였다. 이럴 때에는 단순히 당감동 내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관계를 확대하였다. 당감동에서 생활 기반을 다져나가던 피난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계 모임을 만들었다. 상업을 위한 동일 업종 종사자의 계모임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같은 고향 출신자들끼리 고향 이름을 사용한 계모임도 많았다. 당감동에도 ‘신막계’라고 있었다.

계하다가 말았죠. 신막계. 우리가 신막[황해도 서흥군]에 있었거든. 이북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막이라 불렀지. 당감동에 있는 사람끼리만 했어요. 신막 사람이 많은 이유가 화차를 타고 왔거든요, 부산에 도착해 가지고, 화차째 밀어가지고 조차장으로 간거라. 조차장에서 화차 안에서 생활한거라. 계 모으면 밥 먹고 술 먹고 헤어지고.[박○○ 증언]

한편 여성들끼리의 계 모임이 잘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대규모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던 남구 우암동에는 여성 피난민들이 장사를 하면서 친구를 사귀고, 그들끼리 만든 계 모임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 여성 피난민의 경우 대부분 가족 동반보다는 부부만이 피난한 경우가 많아 의지할 가족이 없었다. 친구들끼리 의존하면서 어려운 피난살이를 이겨나가는 데 친구들 모임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집집마다 닥치는 큰 일, 즉 각종 경조사 때 친구들은 서로 내 일처럼 집안일을 도우고, 필요할 때에는 경제적인 도움까지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북 피난민들이 서로 도와준다고 해서 계속 잘 지낸 것은 아니었다. 피난민들 사이에서도 서로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은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감동에서 방직 공장을 했던 어느 할머니는 “남편이 고향 사람을 잘 믿었는데, 고향서 온 사람들이 팔아 준다고 물건을 가져가서는 다 먹고 돈을 주지 않고, 또 기사들이 순진한 남편을 속이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고향 사람들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북 피난민들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결혼이다. 현재 약 80살을 전후한 어른들은 피난 당시 20살 전후였다. 이 이하는 대부분 미혼인 상태로 피난 왔다. 이들은 남녀 모두 가족 동반 피난이 많았으나, 남성 가운데는 단신 월남도 적지 않았다.

내가 참 고마운 게 부인이 이북 사람이라 빈대떡, 만두 같은 거 이북식으로 하는데 그런거는 좋은데. 김치도 이북식으로 싱겁거든.[당감동 윤○○ 증언]

내가 선보는데, 11명 사진 봤으나 만족 못했어. 이왕이면 이북 여자와 해라해서. 선봐서 결혼했어. 이북 여자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결혼한게. [당감동 오○○ 증언]

이북 출신 남자들이 이북 여자와 결혼한 이유는 음식 문화가 같다는 점, 고향과 같이 마음이 푸근하다는 점을 거론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북 피난민들은 이북 출신자들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았다. 만약 통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부산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피난민이 만든 마을]
피난민들이 부산의 여기저기에 정착해 가면서 피난민 마을을 만들었다. 피난 와서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터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고, 매일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는 형제가 거의 없는 피난민들에게 또 다른 형제이자 울타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정이 들어 지금까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6·25 전쟁 피난민들이 정착해 만든 피난민 마을 몇 곳을 소개한다.

1. 당감동 아바이 마을

6·25 전쟁 당시 당감동의 대부분은 논밭이었고 100여 세대가 채 안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주변에 군 통신 기지창, 가야역 및 철도 조차장, 말 사육장 등이 있었다. 당감동 피난민 마을은 오늘날 당감 1동가야역 관리의 말 마구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초기 이주자 가운데 기관사 가족들이 말 마구간을 개조한 수용소에 살았다고 한다. 수용 범위를 넘는 많은 피난민이 몰리면서 수용소 주변에 움집을 짓고 정착하였다. 피난민이 증가하자 수용소 주변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오늘날 당감 시장과 대비해 옛 시장이라는 의미로 ‘구 시장’ 골목이 조성되었다. 한편 휴전 후 거제도로 피난한 함경도 피난민들이 이주해 와 당감 시장 뒤편에 아바이 마을을 만들었다. ‘흥남냉면’이라는 함경도식 냉면 식당에서 여전히 아바이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외지에서 유랑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이웃한 김지태산이나 당감동 위쪽으로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당감동에는 각종 군사 시설과 피난민들이 만든 소규모 공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태화고무[1959년], 동양고무[1963년], 진양화학[1963년]이 신설 혹은 이주해 오면서 이 마을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대규모 고무 공장으로 마을 인구가 급증하였고 마을 주민들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고무신 공장이 폐업 혹은 이전하면서 마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2. 아미동 무덤 마을

아미동은 일제 강점기 다니마찌[谷町]로 불렸다. 1907년 복병산에 있던 공동묘지가 이곳 산19번지로, 1909년에는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이 공동묘지 아래로 각각 이전해 왔다. 1928년에는 오늘날 아미동 2가 216번지에 위치한 천주교 아파트 자리에 화장장을 신설하였다. 이렇게 보면 일제 강점기 아미동은 산 사람이 사는 장소라기보다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6·25 전쟁이 끝날 무렵 국제 시장보수천 주변의 피난민들이 화재와 정부의 판잣집 철거에 밀려 이곳으로 올라왔다. 이주 당시에는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천막을 쳐서 십 수 가구가 함께 살았다. 점차 세대를 구분하는 벽이 만들어져 판잣집으로 변하고, 이어서 루핑집, 슬레이트집으로 가옥 구조가 변하였다.

아미동은 천마산 자락으로 바람이 많이 닫는 곳이었고, 주거 가능 공간도 넉넉지 못하였다. 게다가 경사가 급하여 주거 공간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갈 곳 없어 몰려드는 사람들은 땅 욕심 없이 서로 양보하며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 피난민들끼리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이 마을은 지형상 마을 공유지가 별로 없고,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대형 시장이 많아 마을 내에는 규모가 큰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국제 시장이나 공동 어시장 등 외부에서 생계 수단을 찾았기 때문에 마을은 휴식처에 지나지 않았다. 생존자 대부분은 국제 시장 주변에서 행상을 하거나, 아니면 지게꾼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하였다. 이웃 사람들과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함께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언어나 문화를 통해 부산 사람과 섞여가고 있는 양상을 확인할 수도 있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피난민 주거지는 2022년 1월 5일 부산광역시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3. 우암동 피난민 마을

우암동 피난민 마을은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를 검사하던 검역소가 출발이었다. 검역을 위해 사육하던 소 막사가 약 40동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간이 넓어 해방 후 귀환 동포와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1·4 후퇴 후 피난민이 증가하고, 또 휴전 이후 거제도 등 부산 인근의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피난민 마을을 형성하였다. 피난민들 가운데는 소 막사가 있던 수용소에 들어가서 살기도 하고, 천막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 외 근처 빈터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피난민들 가운데 여성은 소 막사 근처에 형성된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생계를 꾸렸다.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기도 하고, 포목전, 식당 등을 비롯한 온갖 생필품은 여성들의 손을 거쳐야 했다. 소규모 양말 공장에 다니면서 결혼 자금을 마련했던 아가씨들도 있었다. 남성들은 성창목재와 광명목재, 철사 공장, 부두, 부두 하역장 등에서 젊음을 쏟아 부었다. 막노동을 하면서 맺었던 인연이나 시장 통에서 장사를 하면서 만들어진 계 모임들이 지금도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마을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동항성당을 빠뜨릴 수 없다. 1951년 천막으로 만든 임시 성당으로 출발한 이 성당은 피난민을 위한 구호로 오늘날까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연명할 수 있게 했고, 임산부를 위한 조산원을 비롯한 의료 지원, 어린이집과 같은 교육 사업으로 마을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1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집필항목 검색 닫기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참고문헌 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