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백화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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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159
한자 -百貨店-追憶
영어의미역 The memory of a department store that has disappeared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영숙

    [상세정보]

    유나 백화점 1981년 6월 30일연표보기 - 개업
    유나 백화점 1997년 3월 - 폐업
    미화당 백화점 1949년연표보기 - 개업
    미화당 백화점 1997년 10월 - 폐업
    태화 백화점 1983년 11월연표보기 - 개업
    태화 백화점 1997년 6월 - 폐업
    세원 백화점 1991년 11월연표보기 - 개업
    세원 백화점 1997년 11월 - 폐업
[사라진 백화점의 추억]
1997년 말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체제는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백화점들을 자금난으로 몰아갔다. 여기에 재벌 유통업체들의 공세가 이어지자 부산의 향토 백화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지고 말았다. 1997년 3월 유나 백화점의 폐업을 시작으로, 태화 백화점[6월], 미화당 백화점[10월], 세원·신세화 백화점[11월]이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당시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사라진 이들 백화점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미 기억 속의 추억으로만 자리한 백화점들이지만 그 이름들은 여전히 잊히지 않은 채 사람들의 기억 한편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라진 백화점들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퍼즐 조각 맞추듯 하나 둘 완성해 나가면 잊혔던 추억도 하나 둘 되살아나지 않을까?

[백화점의 탄생]
1980년대 들어 백화점 산업은 호황을 이뤄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백화점들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1981년 6월 30일 중구 신창동 1가에 지하 3층, 지상 9층 규모의 유나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유나 백화점은 부산 최초의 직영 백화점으로 당시 지방에서 유일하게 직영 체제를 갖춘 백화점이었다. 유나 백화점은 대명목재(大明木材) 그룹의 유통 회사인 상우개발(商寓開發)이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삼미(三美)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대상 업체였던 대명목재와 관계 회사인 대명조선(大明造船)과 유나 백화점을 인수하였다. 유나 백화점은 지하 3층, 지상 9층에 연건평 6,280.99㎡로 1층 잡화, 2층 여성 의류, 3층 남성 의류, 4층 아동 의류, 5층 학생용품과 가정용품, 6층 미술관, 7·8·9층은 식당가로 이루어졌다.

부산 지역 최초의 향토 백화점인 미화당 백화점은 슈퍼 업체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중구 남포동에 본관을 건립하면서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였으나, 매장이 협소하여 1990년대 들어 본관 확장을 추진하였다. 1997년 1월 210억 원을 들여 중구 남포동 렛츠 미화당으로 이전하여 개점하였다.

부산의 향토 백화점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이 컸던 태화 쇼핑은 1983년 11월 부산 최대의 상권인 부산진구 서면에 개점하였다. 서면에 자리 잡은 이점을 바탕으로 지역 밀착형 백화점으로 꾸준히 성장한 태화 쇼핑은 1991년에는 매출액 1,000억 원대를 넘기도 하였다. 또한 식품 매장을 직영점으로 운영하는 등 지역 주민들에게 보다 저렴하게 제품을 공급하는 영업 전략이 소비자에게서 큰 호응을 얻어 1995년에는 크레디트 회원이 20만 명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5년부터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 등 수도권 대형 백화점의 부산 진출에 따른 지역 상권의 경쟁 심화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급성장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고,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백화점들은 모두 부도, 폐업, 합병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원래 부산은 중구 광복동에 위치한 미화당과 유나 백화점, 그리고 부산진구 서면의 태화 쇼핑이 도심 상권을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부도심인 동래구에 부산 백화점과 스파 쇼핑, 세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고객 유치를 위한 백화점의 판촉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매년 7월이면 태화 쇼핑, 부산 백화점, 스파 쇼핑, 미화당 백화점, 유나 백화점 등 부산 지역 백화점들은 일제히 바겐세일에 들어가 고객 유치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백화점을 제외한 대형 쇼핑몰이 거의 없었던 시기, 이들 백화점의 바겐세일 기간이 되면 백화점은 연일 몰려드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1980년대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소비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백화점을 이용하는 도시민들은 꾸준히 늘어났다. 이 시기 온갖 사치스러운 상품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까지 두루 갖춘 백화점은 대형화와 전문화 추세로 발전해 나갔다. 1983년 부산 고속버스 터미널에 부산 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새로운 상권이 조성되었고, 고객 유치에도 열을 올렸다. 이즈음 임대만을 해 온 미화당 백화점이 본격적인 직영제로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미화당 백화점이 직영제로 바뀌기 전 백화점 상인들은 대부분 6·25 전쟁 때 월남한 피란민들이었다.

[추억의 미화당 백화점]
중구 광복동미화당 백화점은 한때 부산의 최고 중심지였다. 지금 30대 중반 이상의 나이라면 광복동 거리와 옛 미화당 백화점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92년 어느 신문 기사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광복동에서 친구 등과의 만남을 약속하는 장소로 미화당 백화점 앞이 전체의 30.6%로 가장 높은 38.8%를 차지한 커피숍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미국문화원 부근 유나 백화점 앞이 15.3%로 그 뒤를 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심지어 일반인들도 약속 장소 정하기가 마땅찮으면 미화당 백화점 앞에서 보자고 하였을 정도다.

중구 광복동의 옛 미화당 백화점 일대는 195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복동, 아니 부산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미화당 백화점이 있던 건물은 이미 쇼핑몰로 변하여 옛 모습은 사라졌고 안내판만이 옛 미화당 백화점 자리였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 일대를 가리켜 ‘옛 미화당 백화점 앞’, ‘구 미화당 백화점’, 또는 ‘미화당 거리’라고 부른다.

“무엇보다도 중학교 때 이 미화당 백화점과 인연이 깊었다. 초량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꼭 먼 시내에 있는 이곳을 고집하던 반장 하던 친구 놈 때문이었다. 백화점 자체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저곳으로 올라가면 바로 서울의 남산격인 ‘용두산 공원’으로 부산이 내려다보이는 쇠다리로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이젠 그 이름조차 없어졌지만 지금도 가끔 부산을 가서 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때 생각이 진하게 떠오르곤 한다. 바로 뒷골목의 그 유명한 부산의 ‘고갈비’집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출처: http://blog.naver.com/minoph/110037039983]

“……미화당 백화점, 코 찌질하였던 시절에는 정말 휘황찬란하였고 좁은 백화점이었지만 용두산 공원과 연결된 옥상 철제 다리도 기억나요.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지금도 용두산 공원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출처: http://zizibaek.blog.me/70171732256]

지금이야 부산진구 서면이 더 번화하지만 예전에는 중구 남포동 일대가 부산의 중심이었다. 1970~1980년대 중구 광복동은 젊은이들의 메카였다. 특히 미화당 백화점은 광복동에서도 가장 번화가에 자리하여 미화당 백화점 앞에 한 시간만 서 있으면 아는 사람 서넛은 만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어렸을 때 부산에……태화 백화점이었나……미화당 백화점이었나. 거기 옥상에 조그마한 놀이공원이 있었는데. 그곳만 가면 늘 탔던 것이 큰 로봇……! 그냥 안에 타고 빙글빙글 한 바퀴 몸을 회전하는 것뿐인데. 그게 어찌나 신나고 재미났던지……유년 시절에 가장 인상 깊은 추억 중에 하나.”[출처: http://sweetcoupe.com/130163071315]

[미화당 백화점의 탄생]
미화당 백화점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으로 장한찬이 1949년 12월 설립하였다. 아름다운 꽃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미화당’이란 이름은 그가 미화당 꽃집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설립 당시 미화당은 목조 4층 건물이었는데 1954년에 일부 개수하였고, 1956년 콘크리트 별관을 준공하였다. 당시로서는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옥상에 용두산 공원과 직접 연결되는 철제 다리가 있어 부산의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미화당은 백화점뿐 아니라 미화 극장이라 불린 영화관과 문화 회관, 탁구장 및 카바레 등을 갖춘 복합 건물이었다. 1969년 12월 한 차례 화재로 인하여 미화당 본관 목조 건물이 전소되기도 하였다. 처음 불은 미화당 백화점 옆에 위치한 아주피아노사에서 시작되었다. 아주피아노사 직원이 버린 담뱃불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미화당 백화점 본관으로 번져 1층 포목점과 2층 양복점, 3층에 있던 미화 극장, 카바레, 당구장 등 100여 점포를 태웠다.

“10일 하오 5시 25분쯤 중구 광복로 2가 6. 아주피아노사에서 불이 나 옆에 붙은 미화당 백화점의 본관 건물[4층, 점포 38개]과 부속 건물[4층, 미화 극장, 탁구장, 항도 카바레], 그리고 백화점 동쪽과 북쪽 일대의 아라모드 양장점 등 62개 점포를 모두 태운 후 1시간 55분 만에 진화됐다.”[『경향 신문』, 1969. 12. 11]

[부산 백화점의 상징 미화당 백화점]
미화당 백화점은 1969년 본관 목조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 해 5층으로 신축 재개장하였다. 이후 1984년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설치하였다. 이 시설은 미화당 백화점 손님뿐만 아니라 용두산 공원 관광객도 자주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6·25 전쟁 당시 많은 예술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미화당 백화점 전시실은 이들 예술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일반인들의 여러 가지 작품 전시회로도 이용되었다.

“지난 2일부터 이곳 광복동 미화당에서는 제1회 ‘청화회(聽花會) 꽃 잔치’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6일까지 계속될 이 꽃 잔치는 이곳 각 국민학교 처녀 교사 김(金)봉회 양 등 십칠(一七)명의 작품 칠십(七十)여 점이 전시되고 있는데 최(崔)광자 교사 작품 ‘결혼 전야의 꿈’은 처녀들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어 인기를 모았다.”[「청화회(聽花會) 꽃 잔치 부산 미화당(釜山美化堂)에서」, 『동아 일보』, 1963. 11. 5]

미화당 백화점은 업계 처음으로 가격 정찰제를 도입하였다. 바가지요금과 물건 값 깎기가 성행하던 당시 상거래 관행에서 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974년 미화당 백화점은 부산에서 처음으로 슈퍼 체인 본부를 지정받아 슈퍼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화당 백화점은 이후 할인 마트에도 참여하게 된다. 1997년 당시 미화당은 부산·경남 일원에 15개의 직영 슈퍼 체인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화당 백화점은 1990년대 들어 부산에 재벌 백화점과 대형 할인 마트가 등장하고, 시청 이전(移轉)에 따른 상권의 이동 및 교통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경쟁에서 밀려 사라졌다. 하지만 미화당 백화점은 부산 백화점과 문화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터미널 백화점의 출현]
세원 백화점 은 1991년 11월 1일 부산 동래구의 동래 시외버스 터미널 부지에 지상 5층, 연면적 1만 6859.50㎡, 영업 면적 1만 3884.30㎡ 규모로 문을 열었다. 2층부터 시작되는 세원 백화점은 1층에 버스 터미널이 위치하고 뒤쪽에 혼잡한 터미널 주차장이 있어 국내 백화점으로는 독특한 입지와 여건을 갖추어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독특한 입지 조건은 일본의 지하철역 복합 백화점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백화점 개점 당시 시끄러운 시외버스 터미널의 이미지가 백화점의 이미지에 미칠 영향 때문에 향후 발전에 불안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터미널의 이미지와 백화점의 이미지를 분리하면서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입지 조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개점 1년 만에 매출 570억 원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세원 백화점은 개점 첫 해 최다 매출을 기록한 지방 백화점이자, 부산 지역 2위의 백화점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규모가 가장 컸던 태화 백화점의 경우 1995년 매출액이 2,300억 원을 넘어서기도 하였다. 전국 백화점 가운데 매장 면적당 매출 규모가 가장 클 정도로 호황을 누리는 등 부산 향토 백화점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부산 지역 백화점들은 빠른 매출 신장을 거듭하였다.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11월 말 현재 태화 쇼핑이 396억 5,000만 원을 판매, 지난해 같은 기간 258억 원보다 무려 53.7%의 빠른 신장을 보이고 있고 미화당이 116억 8,000만 원을 판매, 전년 같은 기간 88억 9,000만 원보다 31.6%의 신장을 보이고 있다. 또 삼미의 유나 백화점이 123억 원으로 지난해 97억 원보다 26.8%의 신장을 보였으며, 지난해 5월 문을 열어 11월 말까지 62억 1,000만 원을 판매한 동천 스파 쇼핑이 올해 148억 5,000만 원을 판매, 역시 높은 신장을 기록하고 있다.”[「부산(釜山) 지역 백화점 괄목 신장(伸張) 태화 매출(賣出) 53%나…서울 앞서」, 『매일 경제』, 1988. 12. 13]

[백화점 업계의 판도 변화]
1990년대 초 부산에는 중구 광복동미화당 백화점과 유나 백화점, 부산진구 서면의 태화 쇼핑이 도심 상권을 양분하면서 착실한 판매 실적 성장이라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부도심인 동래구에 부산 백화점과 스파 쇼핑, 세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부산 지역 백화점 업계에 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남구 광안동의 신세화 백화점이 남구 지역 상권의 분할을 목표로 가세하였고, 우성그룹 계열의 리베라 백화점[1994년 4월 개장]이 해운대구에 부산 최대의 매장을 마련한 뒤 부산·양산의 동부 지역 고객을 흡수하면서 빠르게 성장, 백화점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전화로 상품을 주문하고 집에 앉아 물건을 살 수 있는 통신 판매 제도가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부산의 유나 백화점, 태화 백화점, 미화당 백화점, 스파 쇼핑 등 백화점 대부분이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정기적으로 우송되는 카탈로그를 보고 본인이 필요한 상품을 전화나 편지로 주문하면 원하는 날짜에 배달해 주는 판매 방식 등 부산 지역 백화점들은 다양한 마케팅 기법으로 고객 유치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1990년대 중반 태화 백화점, 세원 백화점, 리베라 백화점은 부산 지역의 3대 대형 백화점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는 하루 평균 9만 4,000여 명이 백화점을 찾고 있으며, 한 사람이 평균 3만 1,000원어치의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백화점 상권이 종전의 중구 광복동부산진구 서면 중심에서 동래와 남구로 다변화되고 있다.”[「부산시(釜山市) 백화점 하루 고객 평균 9만 4,000명」, 『매일 경제』, 1994년 9월 3일]

[대형 백화점의 부산 진출]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백화점 사업은 매년 20~3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으나 1995년 현대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이 잇따라 부산에 지점을 개설하면서 지역 백화점들의 매출은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현대 백화점은 동구 범일동조선방직 자리에, 롯데 백화점은 부산진구 부전동부산상업고등학교 터에 문을 열었다. 이에 따라 부산 상권은 세원 백화점, 태화 백화점, 신세화 백화점, 유나 백화점, 미화당 백화점, 부산 백화점, 리베라 백화점 등 지역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 롯데 백화점 등 서울 대형 백화점들이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가격 경쟁 또한 더욱 치열해졌다. 재벌 소유의 대형 백화점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부산 지역 백화점들은 바겐세일이나 특가 판매로 매출액을 올리는 전략도 펼쳤으나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이 부산에 진출하기 전까지 부산 상권은 태화 백화점이 시장의 35%를 차지하였고, 이어 세원 백화점이 20%, 리베라 백화점이 19%의 순으로 뒤를 이었다. 하지만 1995년 하반기 개장한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은 단숨에 부산 지역 상권의 50% 이상을 잠식해 버렸고, 부산 지역 백화점들은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올 들어 극심한 매출 부진에도 불구하고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 부산점은 올 상반기에 각각 2,122억 원과 1,241억 원의 매출을 올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하여 10% 정도의 신장세를 기록하였다. 반면에 부산 지역 7대 백화점은 신관 개장이나 시설 확장 등을 적극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매출액조차 지난해 상반기보다 크게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위기 지방(地方) 백화점……탈출구 있나(상) 지방 유통업계 ‘고사(枯死) 직면’」, 『매일 경제』, 1997. 7. 16]

[부도와 폐업으로 내몰린 지역 백화점]
그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스파 쇼핑이 가장 먼저 1994년 7월 모기업인 동천의 부도와 함께 문을 닫았다. 이어 유나 백화점이 1997년 3월 모기업인 삼미가 무너지면서 최종 부도를 맞았다. 부도 이후 입점 상인들과 업체는 회생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9년 11월 폐점하였다. 미화당 백화점과 함께 중구 남포동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였던 유나 백화점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아직도 많은 부산 시민들의 기억 속에 부산 최초의 백화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습관적으로 뒤적거리던 신문에서 동보 서적 서면점 폐업 소식을 알게 됐다. 안 되는데 이러지 말라는 말과 안타까움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이 소식을 접하니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스파 쇼핑, 태화 쇼핑이라는 곳도 덩달아 떠올랐다. 집이랑 가까운 온천장에 위치해 자주 갔던 스파 쇼핑엔 그람으로 재서 팔던 샐러드 바가 있었다. 그때 먹었던 샐러드의 드레싱 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난다…….”[출처: http://blog.naver.com/badais012/50097127205]

1997년 10월에는 미화당 백화점이 부도를 내고 화의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신세화 백화점도 부도를 냈고, 신세화 백화점 광안점은 이듬해 9월 대형 할인점으로 업종을 변경하였다. 터미널 백화점이었던 세원 백화점 역시 그해 12월 부도를 낸 뒤 2000년 8월 롯데 백화점에 인수되었다. 옛날 세원 백화점은 롯데 백화점이 인수하여 현재 롯데 백화점 동래점이 들어서 영업 중이다.

[서면의 랜드 마크 태화 백화점]
1997년 7월 11일 어느 신문 일면에 「지방 백화점 회장의 외로운 죽음」(『매일 경제』, 1997. 7. 11]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산 지역 백화점 가운데서도 매출 부분 선두 주자였던 태화 백화점의 부도는 창업주 회장을 안타까운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 등 재벌 소유의 대형 백화점들이 부산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태화 백화점은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 백화점으로 부산에서도 최고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창업 초기 자본금 5억 원에 불과하던 태화 백화점은 몇 년 만에 거대 백화점으로 성장하였지만, 재벌 소유 대형 백화점과의 경쟁은 무리한 시설 투자로 이어졌고 결국 1997년 부도를 냈다. 당시 부산의 향토 기업인 태화 백화점을 살리기 위하여 부산상공회의소와 지역 상공인들이 적극 나서 범시민적인 ‘태화 살리기 운동’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태화 백화점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큰 부채액과 대형 백화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경쟁력, 매출액의 급격한 감소 등의 이유로 태화 살리기 운동은 좌절되었고 결국 파산하였다.

“그러니깐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엔 부산 서면엔 태화 쇼핑이라는 백화점이 하나가 우두커니 시내 한복판에 유일한 곳으로 있었다. 유일하다 보니 매출 또한 당연히 손꼽을 정도였던 게다. 물론 지금은 여러 대그룹의 백화점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잊혀 버린 태화 쇼핑의 자리엔 백화점이라기보단 쇼핑몰 느낌의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출처: http://www.cyworld.com/seran792/2465720]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태화 쇼핑은 중구 남포동 유나 백화점, 미화당 백화점과 함께 부산의 첫 백화점으로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서태후’에서 만나자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서면 태화 쇼핑 후문에서 만나자’는 약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 대낮에 간 태화도 왠지 모를 쨍한 여운이 있었다.”[출처: http://www.cyworld.com/seotaekyung/270141]

[사라진 백화점]
이처럼 부산의 향토 백화점들이 연이어 도산한 것은 롯데 백화점과 현대 백화점 등 서울 지역 대형 백화점들이 잇따라 부산 진출을 모색하자 지역 백화점들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고, 대형 백화점들에 비하여 자금력이 절대 열세인 상태에서 무리하게 매장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롯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 현대 백화점 등 서울의 주요 백화점들은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대도시에 이미 백화점 부지를 확보, 대규모 초현대식 백화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롯데 백화점은 이미 부산상업고등학교 자리를 확보, 백화점 호텔 단지를 계획하는 동시에 당시 부산 상권의 핵인 옛 부산시청 부지를 인수할 예정이었다.

이에 태화 백화점은 1988년 기존의 8,264.46㎡인 매장을 1만 3553.72㎡로 늘리기 위하여 확장 공사에 착수하였다. 또한 한양유통이 경영해 온 지하 식품 매장을 직영제로 바꾸는 한편 신용 판매 확대, 고급 이미지 정착 등을 통하여 고정 고객 확보에 나서기도 하였다. 부산 백화점 역시 같은 해 3월부터 지상 3층인 본관 건물을 5층으로 증축, 매장 규모를 1만 1900.83㎡에서 1만 6859.50㎡으로 늘리는 한편 5층에 볼링장과 헬스 클럽 등 레포츠 센터를 신설하고 기존의 주차장을 두 배 크기로 확장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화당 백화점도 1988년 하반기부터 별관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이중 5층까지 6,611.57㎡를 매장으로 쓰고 6·7·8층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공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 닥친 외환 위기로 부산 지역 향토 백화점들은 결국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부산 지역 향토 백화점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신세화 백화점이 2005년 서울 유통 업체에 매각됨으로써 한 때 8개에 달하던 부산 지역 백화점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절 부산을 지켰던 향토 백화점들을 기억하고 있다.

“부산 지하철 이용자 수 부동의 1위 서면을 제쳤다는 신세계 센텀 시티점에 나도 한번 가 봤다.……센텀 시티 앞이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가? 황량하던 그곳이 어찌나 북적이던지……. 암튼 부산에 있던 태화 쇼핑, 부산 백화점, 세원 백화점, 신세화, 리베라, 스파 쇼핑, 유나 백화점, 미화당 등등 롯데의 등장으로 줄줄이 무너졌던 부산 향토 백화점들이 문득 생각나는 하루였다.”[출처: http://paradisestory.tistory.co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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