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매달린 버스 안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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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171
한자 -案內-
영어의미역 Female bus attendant who is clinging to a bu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가연
[버스에 매달린 버스 안내양]
고만고만한 승용차들 사이에 집채만 한 버스가 시원스레 내달린다. 버스 안에는 뛰어난 운전 솜씨를 뽐내는 운전사 말고도 또 다른 한 사람이 탑승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버스 안내양이라고 부르는 여자 차장들이다. 서울 거리에 나타난 여차장들은 다리가 반쯤 드러나는 신식 양장의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표 가방을 둘러맨 채 표를 찍어 주며 낭랑한 목소리로 ‘오라잇’, ‘스톱’ 하고 미소를 띤다. 이러한 자태에 젊은 총각들의 마음은 들뜨고, 안내양의 인기는 금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자동차 생활』 2000년 3월호]

1920년대 버스의 도입과 함께 나타난 버스 안내양은 아직 치마저고리가 익숙하던 시절, 등장과 동시에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그녀들의 옷차림과 상냥한 미소는 뭇 사내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문화적 쇼크였을 것이다. 당시의 버스 안내양들은 17~18세 전후였고, 아직 부모님 곁에서 응석 부릴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도시로 나와 버스를 탈 수밖에 없던 철부지 소녀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버스 안내양은 해방이 되고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남자들이 차장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에게서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욱하는 성질에 손님들과 멱살을 잡기 일쑤였다. 이에 1961년, 버스 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된다. 이때에도 버스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대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누이들이었다. 그녀들은 돈을 벌어 고향 가족의 생계까지도 일부 책임지던 씩씩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녀들은 온몸으로 밀려드는 손님들을 차 속으로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만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야만 했다. 버스에 구겨 넣어진 사람들의 불만과 성추행에 가까운 짓궂은 학생들의 손장난을 버텨야 했고, 어린아이의 차비를 내지 않으려는 엄마와, 회수권 열 장을 교묘하게 잘라 열한 장으로 만든 학생들과도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욕설을 퍼붓는 취객들 때문에 눈물을 쏟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버스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버스 안내양도 버스에 앞문이 생기고, 사람들이 그 앞문에 있는 수거함에 차비를 넣기 시작하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제는 사라진 옛 추억,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만 가는 ‘탕탕!’, ‘오라이’ 소리. 가끔 버스를 탈 때면 그때 그 시절 버스 안내양이 문뜩 생각나곤 한다. 밝은 웃음으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움을 주던 버스 안내양, 그녀들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나 보자.

[20세 꽃다운 나이, 버스에 오르다]
여름 햇살이 따가운 오후, 자전거를 타고 멋지게 유니폼까지 챙겨 입은 한 아주머니가 카페로 들어선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 한눈에 봐도 젊었을 때 꽤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그녀는 1958년생, 올해[2013년] 56세인 김진숙[가명] 씨. 그녀의 고향은 경상남도 진주다. 부산에 내려온 것은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막 20세가 되던 해, 취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시골에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마침 친구들도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해서 기대 만발이었다. 그때가 1977년이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버스 안내양들이었다. 부산에 온 진숙 씨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한 버스 회사로 들어갔다. 회사 면접은 간단했다. 버스 안내양이 모자랐기 때문에 등본 한 통이면 면접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증명사진을 붙인 이력서도 필요 없었다. 지금과 같은 입사 체계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 일하다가 싫증나거나 대우가 좋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미련 없이 옮겨 다닐 수 있었다. 진숙 씨도 27세까지 8년가량 일하면서 거친 회사가 다섯 군데나 된다. 어쨌든 그렇게 면접을 보고 며칠 견습 생활을 한 후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처음 탔던 버스는 태화여객 59번, 당시 구포에서 에덴 공원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59번 버스는 지금도 있는데, 현재는 노선이 조금 달라져서 화명동에서 주례를 거쳐 부산역으로 달린다.

[밀려드는 사람들, 출입문을 사수하라]
당시 버스는 중간에 문이 하나만 있었다. 그 문으로만 사람들이 타고 내려야만 했기 때문에 기사가 돈을 받는 일은 불가능했을 터. 그래서 더욱더 버스 안내양이 필요했다. 일단 버스 안내양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차비를 받기 위해서였다. 대개 탈 때는 빨리빨리 많이 태워야 하니까 무조건 밀어 넣고, 내릴 때 차비를 받았다. 하지만 가끔 차비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손님들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타는 엄마들이 문제였다. 초등학생임이 분명한데 미취학 아동이라고 우기는 엄마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애들한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애들은 절대 거짓말을 못하니까.

또 출퇴근길에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타고 내리기 때문에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분명 돈을 받지 않았는데 줬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고, 사람이 많이 내리는 시내 같은 곳에서는 돈을 안 주고 내빼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비를 내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쓰는 사람들인데 어찌 일일이 다 따라가서 돈을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돈을 안 내려는 사람은 그만큼 작정을 하고 달아나는 건데 말이다. 그럴 때는 재수가 없었거니 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녀는 처음 버스 안내를 시작했을 때의 버스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일반 35원, 학생 25원.

차비도 차비였지만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지금은 대중교통 수단으로 버스뿐만 아니라 택시, 지하철도 있고 무엇보다도 자가용 운전자들이 많아 옛날처럼 버스가 미어터지도록 사람들이 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침저녁으로 버스에 매달려서 위태롭게 거리를 누비는 버스 안내양들이 적지 않았다.

어디 버스 안내양뿐이랴. 손님들 또한 발만 비집고 들어갈 틈만 있어도 버스에 매달렸다. 어떤 힘센 안내양은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사람의 멱살을 잡고 버스에 끌어 올려 태우기도 했다. 손님들도 출근 시간에는 꼭 그 차를 타야 했기에 앞 사람 등을 딱 잡고 무조건 올라탔다. 그럴 때는 버스 안내양들이 내리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간혹 더 이상 자리가 없어 태워 주지 못하면 안내양을 끌어 내리고 타는 사람도 있었다. 막무가내 손님들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으면 힘센 아저씨들이 대신해서 손님들을 밀어 넣어 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버스 안내양들은 버스 문 옆의 양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서 간다.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팔 힘 하나는 끝내 주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태운 다음에는 운전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운전기사의 수완이 발휘되는 절호의 타이밍이 다가온 것이다. 일단 차가 출발하면 기사들은 일부러 차를 울렁울렁 운행했다. 그러면 저절로 사람들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혹여 떨어질까 겁이 나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같아서는 안전 문제 때문에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만원 버스에 손님들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내 쪽으로 가는 노선은 정말 힘들었다.

손님들이 탈 때는 대개 ‘어서 오세요’ 정도의 인사말은 건넸다. 일종의 서비스직이었기 때문에 환영의 인사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내릴 때는 일단 돈을 받는 게 급했기 때문에 인사는 생략했다. 시간에 쫓기니까 빨리빨리 내리게 하고 정확하게 차비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요즘 버스들은 기사 혼자서 운행을 해도 여유가 많은데 그땐 왜 그렇게 시간에 쫓겼는지. ‘빨리빨리’라는 말이 입에, 또 몸에 배어 있던 시절이었다.

[‘탕탕!’ ‘오라이!’]
대개 사람들은 버스 안내양을 떠올릴 때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면서 ‘오라이’ 하고 외치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오라이’라는 말은 버스 안내양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오라이’를 외치는 것에도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 타면 문을 닫음과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출입문 옆을 ‘탕탕’ 두 번 두드리며 ‘오라잇!’ 하고 외친다. 그러다가 멀리서 손님이 뛰어오는 것을 보면 ‘탕’ 하고 한 번 두드리는데, 그 신호에 기사는 가던 차를 도로 멈춘다.

처음 연습할 때는 그 말이 정말 어색했다. ‘오라이, 오라이’ 아무리 연습해도 혀끝에서 맴돌 뿐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오라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정신이 없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버스에서 들리는 ‘오라이’ 소리에 은근히 그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나중에 1980년대에 들어서서 ‘오라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권고가 나온 적도 있었다. 대신 ‘정차’, ‘발차’라는 말을 쓰도록 했는데, 이미 ‘오라이’가 입에 익숙했기 때문에 ‘발차’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진숙 씨는 안내양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해서 ‘오라이’라는 말을 썼다.

버스 안내양들이 ‘오라이’만 외쳤던 것은 아니다. 요즘은 노선도가 자세하고 또 차내 방송으로 내릴 곳을 정확히 알려 주지만, 당시에는 방송이 없었으니까 계속해서 다음 정차하는 곳을 버스 안내양이 알려야 했다.

“다음 정거장은 서면입니다. 내리실 분은 준비하세요!”

사람을 태울 때도 정류장의 사람들에게 버스의 행선지를 알려 주는 것이 중요했다. 또 호객 행위도 해야 했다. 지금은 버스가 회사 소유이지만, 당시에는 지입차들이 많았다. 지입차의 경우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태우는 만큼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태우려고 했다. 그래서 지입차에 탈 때는 뒤차 배차도 앞차가 까먹었고,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정류장에서 대기하기도 했다. 지입차를 타고 다닐 때는 액수가 모자라면 일을 못 한다고 윽박을 받거나, 중간에 가로채지 않았냐고 의심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버스 안내양의 하루]
일제 강점기, 버스 안내양이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그녀들은 월급제가 아닌 시간제로 급료를 받았다. 그래서 일의 강도는 다른 곳보다 셌지만 임금은 많지 않았다. 진숙 씨가 일을 시작했던 1970년대에도 그녀들은 월급이 아닌 일당으로 임금을 받았다. 일은 이틀, 사흘 하고 하루 쉬는 정도였다. 사람이 모자랄 때는 5일씩 연달아서 일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주 5일 근무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보통 출근은 아침 다섯 시에 하고 일찍 마치면 밤 열 시 오십 분, 열여덟 시간을 버스에 매달려 다녔다. 막차를 탈 때는 그것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해서 자정 넘게까지 일했다.

아침밥은 굶고 다닌 적이 많았다. 항상 잠이 모자라고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배차 시간을 좀 늘려서 밥시간을 빼긴 하는데, 일을 하다 보면 좀 늦어질 수 있으니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밥은 보통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전부 회사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일당의 경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처음 버스를 탔을 때 하루 800원 정도였다. 그렇게 1년쯤 일하다 보니 1,200원으로 일당이 올랐다. 정말 획기적으로 올랐기 때문에 연도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979년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급료가 턱없이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아가씨에게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돈은 버스를 많이 타면 탈수록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달에 서너 번만 쉬고 일하기도 했다. 하루 열여덟 시간씩 25일 이상을 일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그 사람들은 정말 철인과 같은 체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았던 진숙 씨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보통 서 있었다. 안내양이 앉는 곳이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단 버스에 타면 퇴근할 때까지 서 있는 것이 기본이다. 손님이 없을 때 문 옆의 자리에 잠깐씩 앉기도 했지만, 앉아 있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은 다시 못 할 것 같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요즘 아가씨들은 절대 안 할 것이라고 진숙 씨는 힘주어 말했다. 여름에는 좀 견딜 만하지만 겨울에는 차 밑으로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옛날에는 낡은 차가 많았기 때문에 밀려들어 오는 찬바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벽에서 바닥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여름에도 에어컨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라 사람이 많이 타면 정말 힘들었다.

맨 처음 들어갔던 59번은 전부 회사 차여서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다 거기로 왔다. 그래서 회사 사정이 많이 안 좋았다. 회사는 하루에 수금 가능한 평균 액수를 정해 놓고, 거기서 모자라면 월급을 까기도 했다. 이른바 ‘삥땅’을 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나그네’들이었다. 사흘 하고 그만두는 일이 허다했다.

진숙 씨는 그 회사에서 1년을 일했다. 일은 배워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힘이 들어도 끝까지 버텼다. 버스 안내양의 일이 배울 게 뭐가 있겠느냐만은, 예를 들어 잔돈을 거슬러 줄 때 5원, 10원을 정확하게 딱 잡는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보니까 그 회사는 다른 곳에 비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지입차 가운데는 자기 식구처럼 안내양을 대하는 곳도 있었는데, 진숙 씨는 일이 처음인지라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 내부 청소도 안내양들의 몫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서둘러 청소를 끝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차 천장을 밤새 다 닦기도 했다. 기사는 다른 일에는 무관심했다. 오로지 운전만 할 뿐 나머지 일들은 전부 안내양들의 차지였다. 일을 할 때는 친구들과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한 번 돌고 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양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그때그때 돈을 바로 사무실에 입금시켜야 했다. 당시 회수권도 일일이 세어서 입금시켜야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 5분, 10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짓궂은 손님들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일부러 발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 차비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던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는 짐을 많이 들고 타면 짐값을 조금 받기도 했는데, 그런 일 때문에 실랑이가 종종 발생했다. 기사들 또한 저마다 사람의 차이가 있었다. 운전을 좀 잘하는 사람들은 포용력이 있었는데, 운전을 못 하는 사람들은 안내양에게 잘못을 돌리고 치고 박고 싸웠다. 또 버스 안에 둘이만 있다 보니 정분이 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런 눈치가 별로 없어서 몰랐는데, 요즘 보니까 기사랑 같이 다니다가 눈 맞아서 결혼한 사람들도 보였다.

[‘삥땅’과 몸수색]
1970년대 말에만 해도 파업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적은 월급에다 그다지 좋지 않은 대우, 그리고 몸수색도 했기 때문에 아마 그런 일들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서울에서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 분위기를 타고 진숙 씨네도 파업 비슷한 것을 했다. 단체로 새벽에 일어나서 아무 버스나 타고 태종대로 도망을 간 것이다. 당시 모든 안내양이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 행동을 하기에 용이했다.

“그 당시 파업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요. 월급도 안 올려 주고 대우도 안 좋고, 또 몸도 치이고. 우리도 단체로 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무 버스나 타고 태종대로 도망간 적이 있었어요. 기숙사에 사는 애들 다 깨워서. 일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70년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대우가 좀 많이 좋아졌지요.”

한편 기사들 담뱃값도 안내양들이 손님들 차비에서 떼어 줬다. 그런데 그 담뱃값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기사가 있었다. 그 사람에게 담뱃값을 못 주겠다고 하니까 안내양들을 너무 괴롭혔다. 그래서 단체로 회사에 항의해서 그 기사를 쫓아낸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담뱃값을 안 주니까 우리를 너무 괴롭히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짜고 그 사람을 해고시킨 적도 있었어요. 항의를 직접 회사에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한테 배차를 해 놓으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안내양이 아무도 안 타는 방식으로 했던 거예요. 그러니 버스 회사에서는 그 기사한테 배차를 안 줬고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했지요.”

안내양 중에서도 조금씩 삥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돈은 주로 쉬는 날 목욕값과 밥값으로 사용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노는 날에는 회사에서 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목욕도 하고 동료들과 밖에서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정도는 아마 대다수의 안내양들이 빼돌렸을 것이다. 진숙 씨도 물론 그랬다. 크게 표시가 안 날 정도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줬다. 쉬는 날 따로 밥값을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눈감아 주지 않았겠느냐고 진숙 씨는 생각한다.

그런데 밖에서 얘기하는 것만큼 몸수색이나 삥땅이 심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진숙 씨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밖의 사람들은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그런 기사를 접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웃을 일이 훨씬 많은 나날들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대우가 확실히 좋아졌다. 겨울에는 따로 유니폼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만 했는데 방한복이 지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버스에 앞문이 생겨서 손님들이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게 되었다. 그에 따라 큰 버스도 많이 등장했다. 일단 손님들이 타고 내리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일하기는 편했다. 그러면서 월급도 조금씩 더 올랐다. 그러나 버스 안에서 안내양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버스를 갈아타다]
59번 버스 회사에서 1년을 일하고 89번으로 옮겼다. 89번은 회사 차보다 지입차들이 많았다. 그래서 만날 같은 운전기사에 같은 차만 탔다. 거기서도 이틀이나 사흘 일하고 하루 쉬는 정도였다. 59번에서 옮기고부터는 일도 익숙해지고 친구들도 많아져서 생활에 좀 여유가 생겼다. 물론 일에도 자신이 붙었다. 보통 회사를 옮길 때는 직접 찾아가서 면접을 보고 옮기는 식이었다. 일단 친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진숙 씨를 데리고 갔다.

“한 번은 친구들하고 너무 일하러 가기 싫은 거라. 그래서 무단결근을 며칠 하고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자동으로 해고되어 버렸어. 호호호.”

89번은 금정구 동삼동에서 영도 청학동을 오가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무단결근으로 인해 89번은 그리 오래 타지 못했고, 바로 86번으로 옮겨 일을 하기 시작했다. 86번은 연산동에서 구덕 운동장으로 가는 버스였다. 산복 도로를 지나갔는데, 지금도 86번은 높고 꼬불꼬불한 산복 도로를 달리고 있다.

86번 버스는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서면에서 안창 마을로 올라갔다가 메리놀병원으로 내려와서 국제 시장으로 가는 코스였고, 차는 일본 도요타에서 나온 미니 버스였다. 산복 도로는 길이 좁고 오르막이 많아서 그 작은 버스는 다른 어떤 버스보다 용이했다. 새벽이나 밤에 86번을 타고 산복 도로를 오르내리면서 봤던 그 경치 또한 얼마나 좋았던지. 진숙 씨는 그 시절을 생각하며 최근에 일부러 86번 버스를 타 보기도 했다. 86번을 운영했던 동성여객은 버스 안내양에 대한 대우도 좋았다. 기숙사 시설도 좋았고 밥도 좋았다.

“동성여객, 여기 있을 때는 적십자에 가입해서 노는 날에 봉사 활동도 다니고 그랬어요. 가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강제로 가입하게 한 거죠. 호호호. 사장님이 복지에 일찍 눈을 떴던 거지. 회사가 부자이기도 했고 안정적이었어요. 기숙사 시설도 괜찮았고 밥도 좋았고요. 기숙사 내에서는 점호 시간 같은 것을 정확하게 안 지키면 처음에는 경고, 나중에는 해고시킬 정도로 규율도 엄했어요.”

요즘 86번 버스는 관광객들이 일부러 타기도 한다. 첫째는 산복 도로를 지나가며 보는 달동네의 야경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고, 둘째는 초량 쪽에 ‘이바구 길’이라는 것이 생겨 볼거리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86번 버스를 더 잘 알고 있다. 32번은 진숙 씨가 탄 마지막 버스였다. 그 버스는 화명동에서 전포동 옛 대우자동차 공장을 돌아가는 노선이었다. 아쉽게도 32번은 지금 사라진 노선이다.

86번이나 32번은 당시로서 황금 노선이었다. 하루 10만 원 이상의 수입이 올랐다. 86번이 다니던 수정동 쪽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 살았고, 산복 도로 곳곳에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32번도 서면을 통과하는 노선이라 사람이 많았고, 특히 화명동 대천천이 유명한 유원지였기 때문에 휴일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32번 버스 회사는 15번 노선버스도 함께 운행하고 있었는데, 그 버스는 구포에서 시골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예전에는 시골이었지만 지금은 도로 포장이 잘되어 있는 호포 금곡 쪽이다. 15번 노선버스에는 의무적으로 열흘에 한 번씩은 타게 되어 있었다. 그 버스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진숙 씨는 아직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길이 얼마나 울퉁불퉁했냐면, 당시 내 친구 중에 가슴이 엄청나게 큰 아이가 있었어요. 걔도 그 버스를 의무적으로 탔지요. 그런데 그 버스를 한번 타고 오면 가슴이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어요. 너무 털털거려서 가슴을 부여잡고 버스를 탔다는 거죠. 그 다음부터 그 친구가 15번을 타고 오면 우리는 친구를 놀리느라 가슴부터 확인했지요. 그런 웃긴 일도 있었네요. 호호호.”

[즐거웠던 기숙사 생활]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에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던 버스 안내양들은 회사가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진숙 씨도 진주에서 처음 올라왔을 때부터 친구들과 기숙사 생활을 했다. 처음 회사는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전등도 없고 그냥 마룻바닥만 있는 기숙사를 제공했지만, 회사를 옮기고부터는 기숙사가 좋아서 생활이 재미있기만 했다. 화명동에 있을 때는 바로 뒤에 대천천이 흘렀다. 그때만 해도 대천천은 꽤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기 때문에 쉬는 날에는 거기서 친구들과 물놀이도 했다. 한편,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는 규율이 엄해서 일정 시간이 되면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엄격한 규율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애들이고 남자 기사들이 많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기사들은 기숙사가 따로 없었지만 혹 풍기가 문란해질까 봐 그랬겠죠. 회사는 우리를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낮에 아저씨들하고 하루 종일 일하는데 무슨 사고가 없었겠어?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미리 예상하고, 어린 애들을 지키려고 그렇게 규율을 엄격하게 한 것이었겠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에는.”

회사로서는 풍기 문란을 예방하고, 당시 어리고 순진했던 버스 안내양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숙사를 무단이탈하거나 이유 없이 외박을 할 때는 한두 번 정도는 봐 줬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예 회사를 나가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밤에 뭔가 먹고 싶으면 바구니에 돈을 담아서 옆 가게에 전달한다. 그러면 가게에서는 그 바구니에 먹을 것과 잔돈을 담아서 다시 보내 주었다.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요.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름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돌이켜 보면 활짝 핀 꽃과 같이 화려했던 날들이었다.

[버스 창을 통해 보는 세상]
진숙 씨는 일을 하면서 부마 항쟁도 겪고 12·12 사태 때 계엄령이 내려진 것도 봤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심각성은 잘 몰랐지만, 계엄령이 내려지면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일단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의도하지 않게 진숙 씨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부마 항쟁 때였다. 그날도 진숙 씨는 남포동을 지나는 86번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때도 계엄령 때문에 열 시만 되면 도로가 차단되었다. 낮에 남포동을 지나는데 학생들이 막 울면서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최루탄이 뭔지 몰랐던 진숙 씨는 덜컥 겁이 났다. 진숙 씨는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최루탄 냄새를 맡고 울고 있었고, 군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저항도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또 장갑차들은 시내 큰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짜 겁나기는 겁나데요.”

진숙 씨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포동에서 학생들을 잡아서 끌고 가는 것도 많이 봤다. 일부 학생들이 진숙 씨네 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아무리 돈을 받는 것이 진숙 씨의 임무라고는 하지만 그 학생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너무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아예 받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숨겨 주고 싶고, 안 타도 억지로 버스에 태우고 싶고 그런 마음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버스에 있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온갖 얘기들이 들린다. 어느 날에는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광주의 하천에서 핏물이 하루 종일 내려온다는 소문도 승객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버스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 놓는다. 그래서 진숙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도 버스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진숙 씨도 나라의 큰 어른이 총탄에 쓰러졌다는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쉬는 날에 부산진구청에 마련되어 있던 빈소에 조문을 가기도 했다.

1983년에 있었던 아웅산 테러 사건도 버스 안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그때도 큰 충격을 받았고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84년의 서면 대아 호텔 화재 사건 때에도 현장에 있었다. 당시 32번 버스가 화명동에서 서면을 지나 전포동으로 갔기 때문에 생생하게 현장을 기억하고 있다. 화재 때문에 서면 로터리가 엉망으로 막혀서 버스가 꼼짝을 못했다. 화재 현장을 쳐다만 보고 있자니 무척 마음이 아팠다.

서면 대아 호텔에서 불이 났을 때 무척이나 안타까웠어요.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창문 밖으로 소리치고 하는데……. 옥상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런데 우리는 길이 막혀서 쳐다만 보고 있을 뿐 어쩔 수가 없잖아요. 나는 남의 지붕에 떨어지는 사람을 바로 봤거든요. 그때는 정말 끔찍했죠.”

한 번은 버스 승객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우연히 고향 소식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날 일을 하는데 나랑 같은 진주 사람들이 탔어요.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진주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때 내가 좋아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걔는 억수로 부잣집 애고 나는 가난한 집 애고. 신분 차가 나다 보니까 좀 사귀다가, 헤어진 것도 아니고 안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런 애매한 관계였어요. 그런데 어떤 손님이 그 애 얘기를 하는 걸 우연히 엿들었어요. 그 남자 집이 진주에서 방앗간을 했거든요. 그 손님들이 하는 얘기가, 방앗간 집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패물을 얼마나 했고 결혼 준비에 돈을 얼마를 썼고 하는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포기를 했는데도 막상 그 말을 들으니까 충격을 받아 들고 있던 돈을 땅에 다 쏟아 버렸지요.”

버스에서 어떻게 그런 우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렇듯 버스는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온갖 얘기들을 다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27세, 버스에서 내리다]
1977년 20세부터 타기 시작한 버스를 1984년 27세 되던 해에 내리게 되었다. 스스로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27세는 안내양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이른바 정리 해고를 당한 것이었다. 버스 안내양은 24세만 넘어도 나이가 많다고 채용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일을 안 하게 되면서 진숙 씨는 결혼을 준비해야 했고 이듬해에 결혼을 하였다.

진숙 씨는 버스에서 내려올 때, 이미 버스 안내양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점점 버스는 손님이 줄어들고 있었고, 그에 상응해서 자가용과 택시가 늘어나고 있었다. 또 지하철도 곧 개통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에 앞문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앞문에 있는 요금함에 토큰을 넣었다. 처음 토큰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많이 편했다. 돈을 일일이 헤아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큰의 사용은 버스 안내양의 종말을 앞당긴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진숙 씨가 일을 그만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안내양들은 대량 해고됐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지어졌던 기숙사들은 부서지고 다른 용도로 대체되었다. 대도시에서는 1985년에서 1986년을 거치면서 버스 안내양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시골에서는 그로부터 1~2년 정도 더 존재하다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1989년 안내원을 태우도록 규정한 「자동차 운수 사업법」 33조가 삭제됨으로써 버스 안내양의 역사는 창고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버스 안내양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버스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 삶의 애환을 싣고 달리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버스 창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접하고, 버스 안에서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배운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타고 부산 시내 여행을 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이제는 버스 안내양들의 낭랑한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 고용노동부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molab_suda)
    • 인터뷰(전 버스 안내양 김진숙[가명, 부산광역시 동래구], 여, 56세, 201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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