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온 사람들, 유배 생활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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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177
한자 流配-流配生活-空間
영어의미역 Those who were sent into exite and the space of life in exile
분야 생활·민속/생활,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우정임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06년연표보기 - 승려 혜정 기장에서 유배 생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6~1621년연표보기 - 윤선도 기장에서 유배 생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89년 2월~1692년연표보기 - 이선 기장에서 유배 생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3년 - 권적 기장 현감으로 좌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3년 7월연표보기 - 윤헌구 기장에서 유배 생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 정몽주 유촉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4년 - 수리정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집승정 유허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 삼성대에 윤선도 시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12월 19일 - 수리정 건립
[유배형이란 어떤 형벌일까?]
유배 생활, 곧 귀양살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될까? 우리는 조선 시대에 관료가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얽혀서 귀양 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사극을 통해 자주 접한다. 이때 귀양 가는 사람은 한결같이 피 묻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오랏줄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의금부 관원들의 엄중한 감시에 뭇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나무 창살로 만들어진 수레에 실려 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유배지(流配地)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누렇게 바랜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걸치고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면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시(詩)로 달래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이 아닌가? 과연 조선 시대 유배 생활이 그랬을까?

유배형(流配刑)은 조선 시대에 오형(五刑) 가운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다. 조선 시대 모든 형률(刑律)의 기준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범죄자의 형벌은 크게 오형으로 규정하였다. 즉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으로, 순서대로 점점 더 무거운 형벌이다.

태형은 오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종아리 아래를 10~50대까지 5등급을 나누어 매로 때리는 것이고, 장형은 허벅지와 볼기를 60~100대까지 5등급을 나누어 때리는 것이다. 태형에 처할 만한 작은 범죄의 경우만 수령이 직접 처결할 수 있었고, 장형 이상의 죄는 반드시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서 집행하도록 하였다. 도형은 비교적 중한 죄를 범한 자를 관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하다. 도형은 반년씩의 차이를 두어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까지 기간이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이에는 각각 장60, 장70, 장80, 장90, 장100이 반드시 뒤따랐다.

유형은 사형 다음으로 중형에 해당하는데,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형벌이다.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약 785.45㎞], 2,500리[약 981.8㎞], 3,000리[1178.18㎞]의 세 등급이 있었으며, 각각 장 100형을 집행하였는데 고위 관료는 장을 받는 대신 속전(贖錢)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형은 오형 가운데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체를 온전히 보전한 상태로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과 머리를 잘라 죽이는 참형(斬刑)이 있었으며, 이 외에 임금이 내리는 약이라는 뜻의 사약(賜藥), 즉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방법도 있었다.

유형은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벽지(僻地), 절해고도(絶海孤島), 원지(遠地)에 보내어 격리하는 형벌이었는데, 정치적 사안이 큰 범죄나 개인의 잘못이 큰 범죄에 활용되었다. 유배의 형벌은 정부 전복의 모반 사건 관련자와 반란에 관계된 자 같은 중한 범죄인부터 술주정과 풍속을 해치는 경우, 직무 태만, 불효 죄, 법을 어기고 술을 빚은 경우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앙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배척되어 유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유배형에는 집행 방법에 따라 부처(付處)와 안치(安置)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는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거처할 곳을 자원할 수 있는 자원부처(自願付處), 고향에 유배되는 본향부처(本鄕付處), 가까운 도에 보내 그곳 수령이 살 곳을 정하는 중도부처(中道付處) 등이 있었다.

안치는 부처에 비해 좀 더 무거운 형벌이다. 유배 지역 내에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 안에 거주를 제한하는 것으로 자원안치(自願安置)와 본향안치(本鄕安置) 같은 가벼운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열악한 섬에 유배시키는 절도안치(絶島安置)와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었다. 위리안치의 경우는 왕족 또는 중신 등 주로 정치범들에게 많이 적용된 형벌로 그 지역 지방관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개인적인 활동 및 주민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유배지와 유배길]
유배형은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대명률』을 따라 정한 조항으로 실제 국토가 좁은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 형조에서 건의하여 죄인이 사는 곳을 기준으로 2,000리 유배형은 20식(息) 밖, 2,500리는 25식 밖, 3,000리는 30식 밖의 지역에 유배지를 정하도록 하였다. 1식이 30리이기 때문에 실제로 2,000리 유배형은 600리[약 235.64㎞], 2,500리 유배형은 750리[약 294.55㎞], 3,000리 유배형은 900리[약 353.45㎞] 정도에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국의 유배지 중에서 가장 험한 곳은 북쪽 변방이나 외딴 섬이었다. 그중에서도 도망갈 가능성이 거의 없고 생활 환경이 열악한 절도(絶島)가 가장 혹독한 곳이었다. 실제 유배지로 지정된 지역은 삼수·갑산 등 함경도와 평안도 등 국경 지역, 남해안의 경우 거제도·진도·남해·제주 등 섬 지방이 자주 이용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된 곳으로는 제주·거제도·진도·흑산도·남해·해남 등의 순서로 빈도수가 나타난다. 그중 부산의 동래가 12번째, 기장이 14번째 순위에 드는 것을 보면 아마 부산이 당시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가진 곳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 가고 싶은 곳으로 손꼽는 곳이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 해남, 해운대, 기장이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시대에 생활 환경이 가장 열악한 유배지로 여겨졌던 곳이 현대에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거나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오히려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하겠다.

대우는 귀양 온 사람이나 지역마다 달랐는데, 일정한 거주 지역을 마련하고 집집마다 날짜를 정하여 돌아가며 먹을 것을 주거나, 고을의 모든 백성에게 고루 거두어 유배인이 거처하는 곳의 집 주인에게 주기도 하였다. 유배인을 부양해야 하는 지역민의 부담 때문에 한 지역의 유배자 수는 10명을 넘지 않도록 인원수를 조정하여 해당 군현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유배지가 결정되면 유배자가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관할하였다. 왕의 윤허를 받아 유배지가 결정되면 의금부 및 형조에서는 유배인을 귀양지[配所]까지 압송해 갈 압송관을 배정하고 유배인에게 단자(單子)를 내려 귀양지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유배인이 압송되어 유배길에 오르면 정해진 기일 내에 귀양지에 도착해야 하였고, 하루에 가야 할 길은 평균 86리[약 33.77㎞]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압송관은 정2품 판서 이상의 관료는 의금부 도사, 종2품 이하 정3품 당상관까지는 의금부 서리, 정3품 당하관 이하 관료는 의금부 나장이 압송하였다. 관직이 없는 일반 사족(士族)은 형조에서 관할하여 역졸이 담당하였다. 이때 압송관은 유배인에게 압송 과정에서 필요한 여행 경비를 공공연히 요구하기도 하는 등 여러 폐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유배지까지 가는 과정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유배지 생활과 유배 가는 과정을 알려 주는 유배 일기가 많이 전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조선 시대 유배 과정과 유배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관직자의 유배 일기로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의 『묵재 일기(默齋日記)』, 조헌(趙憲)이 1589년(선조 22) 함경도 길주로 유배 가서 쓴 『북적 일기(北謫日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인목 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북청 유배길에 올라서 쓴 『백사 선생 북천 일록(白沙先生北遷日錄)』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위리안치 죄인이 기록한 일기로는 1722년(경종 2) 윤양래(尹陽來)가 함경도 갑산에 유배 간 과정을 쓴 『북천 일기(北遷日記)』가 있으며, 관직이 없는 유생 이필익(李必益)이 1674년(숙종 즉위년) 2차 예송 때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안변으로 유배가 쓴 『북찬록(北竄錄)』이 있다.

유배 일기를 통해 유배인의 유배 과정과 생활 모습을 보면, 유배자가 일반 사족일 경우와 관직자일 경우가 상당히 달랐다. 일반 사족은 형조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본인이 형조에 나가서 명을 기다렸다가 역자(驛子)가 형조에 와서 죄인을 인계받아 직접 압송해 가서 다음 관할지에 인수인계하였다. 또한 이들은 유배길에 소용되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기 때문에 유배길이 상당한 고역이었다.

이에 비해 관직자의 경우 의금부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이를 알려 주면 본가(本家)에서 출발하며, 압송관과 동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관직자에게는 국가에서 말과 음식을 제공하였고, 노비나 아들이 시종하고 갈 수 있게 하였다. 숙종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갑술옥사로 함경도, 전라도 등지로 유배하던 사실을 그 셋째 아들인 이재(李栽)가 시종하면서 적은 일기인 『창구객일(蒼拘客日)』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관직자의 경우에는 유배 길목에 있는 지역 수령들이 유배길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금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기장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경우 함경도 경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령이 수많은 물품과 함께 노비 40여 명 및 말 20여 필을 제공하였고, 지나는 길목에 있는 고을에 미리 통지하여 접대를 잘 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윤선도가 유배길에 조생이라는 기생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위로하기에 그 총명함에 감탄하여 시를 지어 주기도 한 것을 보면, 그의 유배 행차는 죄인의 행차라기보다 마치 중앙 관원이 지방에 출장 가는 것처럼 성대하고 화려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원로대신의 유배길은 유배 행차를 관광하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광해군 대에 인목 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 1월 63세의 연로한 나이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 이항복의 유배길은 『백사 선생 북천 일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항복의 유배길은 죄인으로서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수차례에 걸쳐 친지 및 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하고, 시종하는 자제와 노비들이 모시고 길을 가면서 이르는 곳마다 수령들의 후한 접대와 보살핌이 이어졌다. 63세의 연로한 나이만 아니라면 유람에라도 오른 듯한 모습이다.

압송관은 원칙적으로 유배인을 귀양지까지 직접 압송해야 하지만, 실제로 동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유배인이 관직자일 경우 실질적으로 동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유배인과 압송관이 각자 자신의 여정에 따라 별도로 길을 가서 저녁에 숙박지에서 확인하는 정도이거나, 심지어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 압송관이 당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문건은 명종 대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는데, 그가 남긴 『묵재일기』에 귀양지 생활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문건은 유배길 도중에 처가가 있던 괴산에 2일 정도 묵으면서 친척들을 만나고 괴산 군수를 비롯한 여러 사족에게서 각종 물품과 금전을 제공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유배길은 노비 6명과 말 4필을 타고 가는 성대한 행차 길이었다. 성주에 갈 때까지 압송관이 동행하지 않았으며 도착하였을 때는 5~6명의 아전이 마중을 나오기까지 하였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죄명과 도착 날짜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형조에 장부를 비치하였다.

[유배지의 생활]
16세기에 관료의 유배 생활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로 이문건이 20여 년간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쓴 일기인 『묵재일기』가 있다. 『묵재일기』에 따르면 이문건은 유배 이후 처가인 괴산과 유배지인 성주를 중심으로 토지를 싼값으로 사들여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많은 노비를 괴산에 두고 수시로 성주에 오가게 하며 친척들의 서신 교환 및 물자의 수수와 운송은 물론 농사의 시기와 방법 등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11~12월에는 정기적으로 5~6명의 노비를 김해와 대구 등지에 보내 청어(靑魚)를 구입하여 괴산에 가져가 팔아서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은 낙동강 유역의 지역적·계절적 청어의 가격 차이를 이용한 상업 활동이라고 하겠다. 또한 면포와 명주 베의 방납(防納)으로 4~5배에 해당하는 이익을 남기고, 환곡을 대납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이문건은 사화가 연이어 발생한 16세기 정치적 변동기에 중앙 관료를 역임하였기에 귀양에서 풀려나면 언제든 다시 중앙의 요직을 맡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성주 목사와 경상도 관찰사 및 도사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지역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세기 학자 관료 유희춘(柳希春)은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고향이 제주도와 가까운 해남이라는 점 때문에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유희춘은 종성에서 19년간 귀양살이하면서 그곳 현감의 여종을 첩으로 들여 딸 넷을 낳고 살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으나 그가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정약용은 1801년(순조 1)의 천주교 박해 때 유배를 당하여 유배 생활을 하면서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이를 보면 유배인은 유배지에서 지역민과 활발하게 교유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유배 생활을 하면서 첩을 두고 자식을 낳으며, 재산을 증식하고, 학문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을까?

조선 시대에 모든 유형 죄를 범한 자는 처첩이 따라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유배지의 일정한 지역 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가족과 하인을 거느리고 주택을 매입하여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설사 위리안치형(圍籬安置刑)을 받더라도 신체적 구속을 직접 당하거나 가족 및 외부 접촉이 차단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배형에 처해진다는 것은 유배 생활 자체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중앙 정계에서 추방되어 정치·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고립되는 정치·사회적·심리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변방의 유배지, 아름다운 기장]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 기장현 조(機張縣條)에 기장현은 동쪽으로 해안까지 8리[약 3.14㎞], 남쪽으로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4리[약 5.5㎞], 서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32리[약 12.57㎞], 북쪽으로 울산군(蔚山郡) 경계까지 49리[약 19.24㎞]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71리[약 381.33㎞]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기장현은 경상도에서 동해 바다를 끼고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가 1,000리[약 392.73㎞]에 이를 정도로 변방 해안가에 위치한다.

또한 왜와 인접한 동해안에 자리하여 고려 말부터 왜구가 창궐하면서 기장 지역 백성들은 왜구의 침탈을 격심하게 겪기도 하였다. 1396년(태조 5에는 왜적의 침입으로 병선(兵船)이 탈취되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죽었으며, 동래(東萊)·동평성(東平城)과 함께 기장성(機張城)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기장읍성을 침략하여 치열한 전투 없이 성이 함락되었고, 이후 왜군은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임랑포 왜성(林浪浦倭城)을 쌓아 침략의 전진 기지를 만들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장은 일본군의 주둔지로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침탈을 겪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기장 지역은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성=머리성’이라는 의미의 ‘차성(車城)’이라고도 불렸다.

즉, 기장은 서울에서 1,000리나 멀리 떨어진 변방 해안가에 자리 잡은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가진 지역이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추방되어 오랜 기간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유배지로서 적합한 곳으로 여겨졌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 보내는 3,000리[조선은 현실적으로 900리] 유배형을 보낼 수 있는 지역에 해당하기에 기장은 조선 시대에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 그래서 기장에는 유배를 온 인물들과 얽힌 고사가 전해지는 곳이 산재해 있는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황학대(黃鶴臺)·삼성대(三聖臺)와 유배 온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기장의 절경에 취해 시를 읊었다는 오랑대(五郞臺)가 대표적이다.

또한 기장에는 귀양 온 선비뿐 아니라 많은 묵객들이 들러 정경에 취하여 시문을 남긴 아름다운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기장군지(機張君誌)』에는 중국의 소상 팔경(瀟湘八景)에 비유하여 기장의 팔경을 선정하였다. 제1경 달음산, 제2경 죽도(竹島), 제3경 일광 해수욕장, 제4경 장안사 계곡, 제5경 홍연 폭포, 제6경 소학대, 제7경 시랑대(侍郞臺), 제8경 임랑 해수욕장이라 한다. 이 외에도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포구와 북쪽의 산지를 중심으로 명승지가 즐비하다.

조선 시대에 열악한 변방 유배지로 인식되던 기장은 오늘날 남동쪽으로는 바다를, 북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발 고도 587.5m 바위산인 취봉산은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맨 먼저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 장안사척판암이 있는 불광산 일대는 예부터 단풍 명소로 유명하고, 장안사 계곡인 금수동(錦水洞)은 숲이 울창하고 물이 맑아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에 위치한 일광 해수욕장은 기장 팔경 중 하나로 금빛 모래가 넓게 깔려 있으며, 이 금빛 모래 위로 오르내리는 갈매기의 군무가 아름답다. 이곳은 오영수(吳永壽)의 소설 「갯마을」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고, 1965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촬영을 한 곳이기도 하다. 기장에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바탕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 또한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아 지금도 우리나라 영화인들에게 영화 촬영지로 선호되고 있다.

특히 검푸른 바닷물이 발아래에서 넘실대는 동해 바닷가 기암절벽 위의 해송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해동용궁사는 주위 경관이 빼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할 정도이다. 절의 오른쪽 절벽에 위치한 시랑대에 새겨진 여러 시(詩)들은 이곳의 절경이 예부터 이름 높았음을 입증한다. 빼어난 절경으로 이곳은 사찰이기에 앞서 관광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바다와 산이 절경을 이루고, 기암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와 가슴이 탁 트이는 수평선, 그래서 해동용궁사를 찾은 이들은 다시 찾게 된다.

기장읍 연화리 마을 앞에 있는 작은 섬 죽도는 기장 지역 유일한 섬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기장 팔경의 하나로 불렸다. 『교남지(嶠南誌)』 기장군 산천조에 죽도는 형상이 물 위에 떠 있는 거북과 같다고 소개한 것을 보면, 섬의 모양이 아니라 섬에 있는 대나무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도의 대나무는 예전에 상당히 유명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근래에는 대밭은 별로 없고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자생하여 동백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죽도는 예부터 많은 묵객들이 자주 찾던 기장의 대표적인 명소인데, 지금은 육지와 섬을 잇는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 건너갈 수는 있지만 개인 소유로 섬을 제대로 즐길 수는 없어 이곳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애태우게 한다.

이 외에도 조선 시대에 읍파정(揖波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적선대(謫仙臺)는 신선이 죄를 짓고 이곳에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 할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데,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일출의 경관이 신비로웠다고 전한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극찬할 때 예부터 선조들은 ‘신선이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고 하였던가? 궁벽한 곳에 자리하여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감내해야 하던 유배지 기장이 산과 바다를 낀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가진 곳으로 신선이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는 극찬을 받았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잊혀 지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한 유배인을 위로함인지 알 수 없으나 바쁘게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는 짧은 기간 귀양인의 몸이 되어 신선놀음을 하고프게 만드는 곳이 기장이 아닌가 한다.

[기장에 유배 온 사람들과 그에 얽힌 명소]
기장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바닷가의 잔읍(殘邑)으로 피폐함이 더욱 심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비슷한 기록이 문헌 자료에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은 중앙 정부에서 볼 때 기장이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선 시대에 유배지로 잦은 빈도를 보인다. 그러나 『고종실록(高宗實錄)』 1868년(고종 5) 기사에 “의정부에서 경상 감사 오취선(吳取善)의 보고에 따라 기장은 동래와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므로 귀양지로 정하지 말 것을 건의하자 왕이 이를 수용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기장은 1868년 이후 유배지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기장에 유배 온 인물은 1406년(태종 6) 승려 혜정(惠正)이 처음 보이고, 1863년(고종 즉위년) 7월에 유생 윤헌구(尹憲九)가 마지막 유배인으로 확인된다. 그 기간 내에 기장에 유배 온 대표적인 인물이자 기장에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은 1618년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유배 온 윤선도와 1689년(숙종 15) 2월에 유배 온 이조 참판 지호(芝湖) 이선(李選)을 들 수 있다.

1. 고산 윤선도황학대

고산 윤선도는 조선 시대 송강(松江)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시조 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인물로, 14세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여 사망하기 2년 전인 83세에 붓을 놓았으니 70년간 시조 75수, 한시(漢詩) 259편을 남겼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30세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한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 등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밝히는 상소인 병진소(丙辰疎)를 올려 이듬해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기장에서 6년[32세], 영덕에서 1년[52세], 삼수 5년[74세], 광양 2년[79세]을 합하여 16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30대에 함경도 경원으로 처음 유배되었는데, 경원은 조선 땅이긴 하지만 풍속과 기후도 판이하게 다르고 땅이 척박하여 생활하기 불편한 변방이었다. 하지만 경원이 귀양지로 가장 척박한 곳이었으나 북쪽 변방 오랑캐 땅에 가까운 곳이라 만일에 있을 역모를 피하기 위해 1년 뒤에 다시 유배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이후 기장에서 6년간 지냈는데, 윤선도가 유배 생활을 가장 오래한 곳이기도 하다. 젊고 패기 넘치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관료의 부당한 정치적 행동을 지적하다가 32세부터 37세까지 6년이란 긴 시간을 기장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 시조 문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윤선도가 유배 중에 남긴 시와 글은 『고산 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하는데, 40수에 이르는 한글 시조인 「어부사시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유배 기간 중에 지은 한글 시조 「견회요(遣懷謠)[시름을 쫓는 노래」 5수에는 신념에 충실한 강직한 삶과 결백한 마음을 하소연한 것, 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마음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정치 현실에서 소외된 젊은 지식인의 유배 생활의 아픈 마음을 느끼게 한다.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 고산황학대를 매일 찾았다고 전한다.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豆湖) 마을 북쪽에 바다 쪽으로 돌출된 암반 위에 소나무 숲이 있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 형성조에 “황학대는 군의 동쪽 10리[약 3.93㎞]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읍지에 기록될 만큼 조선 후기에도 경치가 유명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학대는 육지와 이어지고 황색의 바위가 길게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다에 돌출되어 있어, 그 모습이 마치 황학이 나래를 펴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두호 마을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수십 그루의 노송에 둘러싸여 있는 황학대는 옛날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쯔 강[揚子江] 하류의 이태백·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한 많은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을 뒤에 있는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죽성 사람들을 보살피곤 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여태껏 구전되어 온다.

이곳은 수년 전만 하여도 백사장과 해송이 펼쳐져 있었으나, 최근 어항과 해안 도로 개설 공사로 백사장의 면적과 해송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해와 병충해로 고사 직전에 있는 해송은 안타까움을 더하는데, 윤선도가 즐겨 찾았던 당시 황학대의 소나무 숲에서 보는 일출 장면은 더없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2. 지호 이선과 수리정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중리 마을에는 기장에 유배 온 이선과 관련된 수리정(愁離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리정은 이곳 출신으로 숙종 대 정헌대부(正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문세명(文世鳴)이 세웠는데, 원래는 집승정(集勝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689년 정2품 이조 참판 지호 이선이 기사환국(己巳換局) 사건에 연루되어 기장으로 유배 와서 ‘이 정자에 오르기만 하면 근심 걱정이 멀리 떠난다’고 하여 수리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선은 기장에서 4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689년에 궁녀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아들을 세자로 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봉하였다. 이때 이를 반대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대거 귀양을 가거나 파직되고 남인들이 등용되었는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이선은 서인의 당색을 지닌 인물로 이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기장으로 귀양 와서 1692년(숙종 18) 귀양살이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선은 기장으로 유배되어 철마면 웅천리에 있는 문세명의 사저에서 은거하였다. 천리 밖으로 유배되어 지낸 장소가 그 지역 출신 선비의 사저라니 조선 시대 관료의 유배 생활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오히려 지역의 명망가가 자신의 집에 거소를 마련하여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선이 기장에서 4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같은 서인인 정철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가사 외에 단가 77수를 집대성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이선이 기장에서 재정리하였다는 정철의 작품은 송강 가사(松江歌辭) 중 단가(短歌) 80수 가운데 30수라는 또 다른 연구도 있다. 이들 연구를 보면 이선이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문세명의 사저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을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선이 귀양 와서 머물렀다는 수리정은 오랫동안 자취 없이 흔적만 남아 있었으나, 1974년 마을 주민들이 이선을 기리기 위해 정자의 옛터인 철마면 용천리 중리 마을 수리정 터에 수리정비를 세웠고, 1977년에는 문세명의 후손들이 집승정 유허비를 수리정비 옆에 건립하였다. 이후 정자를 다시 세우기 위해 2000년 초부터 수리정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수리정에 대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수집한 끝에 2005년 12월 19일 옛터에 육각 정자인 수리정을 건립하였다. 마음이 울적할 때 수리정에 올라 지호 이선의 시를 읊어 보면 근심이 달래지지 않을까?

3. 일광 해수욕장 삼성대정몽주, 윤선도

삼성대일광면 삼성리 삼성 마을 남쪽 해변 일대를 말하였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광 해수욕장 백사장 한가운데 있는 높이 4~5m로 이루어진 둔덕을 삼성대라 부르고 있다. 삼성리의 마을 유래가 된 삼성대는 1791년에 간행된 『고산 유고』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기장현 형성조에 삼성대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도 “삼성대는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은 18·19세기에 이미 기장의 명승지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사람들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 세 명의 문인들이 와서 경치를 즐겼다는 일화에서 삼성대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정몽주 등이 기장 지역에 왔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삼성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세룡암의 경내에 1935년 세운 정몽주 유촉비[圃隱鄭先生遺囑碑]가 있는데, 정몽주 등이 이곳에 왔다는 정확한 근거에서보다는 삼성대의 유래를 토대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삼성대정몽주와 연관시킨다면, 정몽주는 고려 말 1375년(우왕 1) 언양현[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요도에 유배되었던 적이 있다. 이때 정몽주가 인근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았을 것이고, 그때 일광면 삼성리를 방문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삼성대고산 윤선도가 32세부터 37세까지 6년간 유배 생활을 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윤선도가 기장에 있는 동안 그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지명으로, 유일하게 『고산 유고』에 나와 있다. 윤선도가 기장에 귀양 와서 동생과 이별하며 시 두 편을 지어 남겼는데[「증별소제(贈別少弟)」 2수·「삼성대작(三聖臺作)」] 여기에 삼성대란 명칭이 나타난다.

고산의 나이 35세에 서제(庶第) 선양(善養)이 귀양지 기장까지 찾아왔다. 아우가 얼마 동안 기장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성대에서 돌아가는 아우를 전송하면서 애끓는 형제애를 두 수의 시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세운 기장군 일광 해수욕장 해안가 야트막한 언덕인 삼성대윤선도의 시비가 있는데, 삼성대에서 동생과 이별하면서 지은 두 수의 시와 당시 윤선도의 마음을 표현한 시 한 수를 새겨서 그를 기리고 있다.

「증별소제」 2수

[공서제선양 자주금계중추념오일송지 삼성대이작(公庶弟善養自註金鷄仲秋念五日送至三聖臺而作)]

너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가로 막을 것이며[若命新阡隔幾山]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하리[隨波其奈赧生顔]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臨分惟有千行淚]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는구나[灑爾衣裾點點斑].

[그 당시에 돈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일이 있었으며 수파(隨波)란 이것을 가리킴(時有納鍰 自贖之事 隨波卽指此也)].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我馬騑騑汝馬遲]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此行那忍勿追隨]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無情最是秋天日]

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不爲離人駐少時].

병중유회 일수(病中遺懷一首)

편히 살기 위해서 도깨비를 막음이 어찌 나만의 즐거움이랴[居夷禦魅豈余娛]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먼저 가졌기에 모든 것이 절로 걱정이네[戀國懷先每自虞]

산 넘어 옮겨 사는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지 마라[莫怪踰山移住苦]

서울 바라보니 도리어 막힘이 없구나[望京猶覺一重無].

윤선도가 왜 이곳에서 동생을 떠나보내면서 시를 지었을까? 그것은 윤선도가 기장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즐겨 찾아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유배의 회환을 달래던 곳이 삼성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긴 시를 통해 짐작해 보면 삼성대는 17세기 초에도 아름다운 절경으로 이름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4. 권적시랑대

시랑대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동암 마을 남쪽 해변에 있으며, 해동용궁사 옆쪽에 있는 바위의 대(臺)를 일컫는다. 예부터 기장 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승지이다. 원래는 원앙대였는데, 1733년(영조 9) 이조 참의 권적(權摘)이 좌천되어 기장 현감 으로 재직하다가 이곳에 와서 자연석에 자신의 벼슬인 시랑(侍郞)을 따서 ‘시랑대’라는 글과 자작시를 새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권적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謫居猶得近蓬萊].

이 사람은 천조[이조 참의]에서 여기에 왔구나[人自天曹二席來].

석 자를 써서 푸른 바위에 밝혔으니[三字丹書明翠壁]

천추의 긴 세월 동안 시랑대로 남으리라[千秋留作侍郞臺].

권적은 암행어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박문수(朴文秀)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 으로 좌천되었다. 중앙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하다가 궁벽한 동해 남단에 지방관으로 좌천된 기분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며 울분과 서러움을 시로 남긴 것이다.

시랑대라 새겨져 있는 바위 앞의 다른 자연석에는 ‘엄신영 제우영(嚴信永弟宇永)’이라는 각자를 비롯하여 엄신영(嚴信永), 손경현(孫庚鉉), 이후서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찾아 시를 남겨 놓았다. 경관이 빼어난 시랑대에는 권적뿐 아니라 많은 시인 묵객들이 와서 절경을 즐겼던 것으로 생각되며, 시랑대권적의 관직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시랑대란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시랑대신오(辛奧)의 「시랑대기」에 “바위 위에는 가운데가 안방 같으며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어 사오십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하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시랑대의 뒤편은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동해 푸른 바다가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어 절경을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도 이러한 절경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외진 벽지에 귀양 온 관료들의 시름을 달래기에 빼어난 절경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드물 듯하다. 기장의 동해 바다 해안가 기암괴석과 울창한 송림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소외된 유배인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놓고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이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접근하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해동용궁사를 통해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실제 해동용궁사는 부산 사람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려졌지만, 기장 팔경의 하나인 시랑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해동용궁사를 찾는 길에 시랑대에 들러 아름다운 절경을 보며 시 한 수를 읊어 보자.

5. 오랑대의 다섯 선비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 있는 오랑대는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정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랑대가 있는 연화리 일대는 기장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 즐비해 있었는데,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도로변 일대가 모두 철거되었다. 해안 도로에 연해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해안선에 우뚝 솟은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오랑대이다. 오랑대에는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해신당이 있어 바닷가 지역민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해안가에 우뚝 솟은 기암의 끝자락에 예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해신당이 오랑대의 멋진 풍광과 어우러져 동해 일출이 더욱 장관을 이루어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연초에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오랑대 일출의 장관을 포착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 지금은 주말에 드라이브하는 해안 도로에서 만날 수 있는 해안가 절경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천리 떨어진 궁벽한 지역에 귀양살이하는 스승을, 형제를, 친구를 두고 떠나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던 곳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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