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 시대의 해양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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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292
한자 統一新羅時代-海洋交流
영어의미역 Marine Trade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근우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바다를 통한 문물 교류.

[개설]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은 수도 경주의 외항인 울산을 통해 당(唐) 및 일본과의 해양 교류를 전개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먼저 통일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는 150여 회에 걸쳐 있었다. 주요 교통로는 당항성에서 가는 항로였으므로, 부산 지역을 경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시기 부산 지역을 경유하는 해양 교류는 일본 열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7세기 이후 일본 열도의 왜는 대외 교섭 창구를 북부 규슈[九州] 지역, 특히 다자이후[大宰府]라고 불리는 기관으로 단일화하여 제한하였다.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663년(문무왕 3)에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이 군대를 보내 신라와 싸운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일본은 신라와 당의 공격을 막기 위해 쓰시마[對馬]의 가네다죠[金田城]을 비롯하여 북부 규슈의 오노죠[大野城]와 미즈키[水城],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기노죠[鬼ノ城] 등을 축성하였다. 이처럼 산성을 쌓은 지역이야말로 평상시에는 외교와 교역을 위한 경로가 될 수 있었다.

[통일 신라와 일본 사절단의 왕래]
통일 신라 시대에 일본은 약 30회에 걸쳐 신라에 사절단인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는데, 당에 파견한 사절단인 견당사(遣唐使)의 2배에 달하는 회수이다. 신라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부터 왜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였으며, 신라도 668년(문무왕 8)에 급찬(給飡) 김동암(金東巖), 669년(문무왕 9)에 사찬(沙湌) 독유(督儒) 등의 사절단인 견일본사(遣日本使)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왕래하는 항로는 일본이 대외 교섭 창구를 다자이후로 제한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산~대마도~다자이후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하게 되었다. 752년(경덕왕 11)에 김태렴(金泰廉)의 파견을 정점으로 공식적인 사신 파견은 감소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견신라사 파견은 일본의 견당사 배가 남해안에서 난파되거나 표류민이 발생하였을 때 표류민의 송환 임무를 띠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의 배]
해양 교류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배의 존재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대마도의 도사(島司)가 아뢰기를, ‘먼 바다로 나가면 풍파의 위험이 많고, 해마다 4차례의 공조(貢調)도 종종 침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해 듣건대, 신라의 배[신라선(新羅船)]는 능히 파도를 넘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신라선 6척 중 1척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허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840년]. 이때 신라선 6척은 다자이후가 규슈 지역의 조세를 중앙으로 나르기 위해서 마련한 것인데, 신라의 장인(匠人)을 불러 만들었거나 신라로부터 구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신라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넘나드는 항해술뿐만 아니라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도 만들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해양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통일 신라의 해적]
다자이후를 비롯한 규슈 지역으로 신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이들은 신라와 당의 물품을 일본에 팔고 일본의 물품을 신라나 당으로 운반하였다. 이 와중에 해적들도 할거하였는데, 9세기 초반부터 통일 신라의 해적이 규슈 지역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869년(경문왕 9)에 신라의 해적선 2척이 지쿠젠[筑前]의 나카군[那珂郡] 오츠[大津]에 이르러 부젠국[豊前國]의 공조선(貢調船)[조세 운반선]에 실려 있던 비단을 약탈하여 달아났다.

894년(진성 여왕 8)[일본 간뾰[寛平] 6]에는 100척, 2,500명에 달하는 대선단이 대마도의 사스우라[佐須浦]를 습격하였다. 이때 대마도가 이들을 쳐서 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사로잡힌 통일 신라의 해적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고 창고가 비게 되어 왕명으로 곡물과 비단을 훔치러 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왜곡된 표현이고, 사실은 통일 신라 말기에 극심하게 어려워진 신라 사람들의 해적 활동이라 판단된다.

[교류 물품]
부산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신라 시대의 일본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는 적다. 이는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역품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나라[奈良] 토오다이지[東大寺]의 쇼소잉[正倉院]에는 많은 신라 물품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금(新羅琴)[한국의 가야금]·놋그릇·양탄자[모전(毛氈)]·먹 등이 있다. 일본의 관인들이 신라의 물품을 사기 위해서 제출한 문서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일본 상인들이 신라 무역품을 매입하기 위해 일본 관청에 제출하는 물품 주문 목록]에 따르면, 황금·다목[소방(蘇芳), 물감 원료]·거울 등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이 대가로 지급하는 물품은 명주실과 명주솜이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삼한 및 삼국 시대의 금속기·석제품·토기 등과 달리 후대까지 남기 어려워서 구체적인 물품이 확인된 사례가 없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통일 신라 시대에 대마도를 거쳐 다자이후로 가는 항로가 결정되면서 부산 지역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일찍부터 경주에서 울산으로 나와서 일본 열도의 이즈모[出雲] 지역으로 가는 항로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다자이후로 가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가는 것이 편리하고 안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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