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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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573
한자 多大鎭城
영어의미역 Dadaejinseong Fortress
이칭/별칭 다대포진성,부산 미래유산 제8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일대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양흥숙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던 조선 시대 경상좌도 수군첨절제사의 군영(軍營)과 그 성곽.

[변천]
다대진은 1417년(태종 14)에 종4품 수군 만호(萬戶)가 파견되기 시작한 군사 진영으로, 『경국대전』 속 경상좌도 부산포진(釜山浦鎭) 관할 10개 수군 만호영 중의 하나이다. 1485년(성종 16)에 진성(鎭城) 보다 작은 성인 보(堡)가 세워진 바 있고, 1490년(성종 21) 높이 13자, 둘레 1,806자의 다대진성이 완성되었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 이후, 경상도 수군 강화책에 따라서 첨사영으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성곽과 관아 건물이 거의 무너지고 불타 없어져, 전쟁이 끝난 후 수군 진영의 정비 때 진성을 복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쟁 후 다대진을 강화하고자 오랫 동안 서울 군문(軍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를 파견하고, 1654년(효종 5)에는 다대진첨사는 국가 말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1751년(영조 27)에는 왜적이 오면 가장 먼저 경계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지역[초경(初警)]이 되기 때문에 국경 지역에서 근무한 경험 즉 변지이력(邊地履歷)을 갖춘 무관을 다대진 첨사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1881년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설치된 이후, 관할 만호영인 서평포진(西平浦鎭)이 절영도진으로 이속되고, 감목관도 절영도진 첨사가 겸직하게 되어 다대진의 위상이 약화되는 듯하였다. 이후 절영도진을 다대진에서 관할하게 되었으나 1895년 군제 개혁으로 다대진은 사라지게 되었다.

[형태]
다대진성은 경상좌도 수군첨절제사[첨사]가 있는 군영으로서 많은 관청 건물과 수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872년에 그려진 「다대진지도(多大鎭地圖)」를 보면 진성(鎭城)은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있었다. 모든 문은 아래에는 출입하는 문을 내고, 위에는 초소 역할을 하는 문루(門樓)를 갖추고 있었다. 동문에서 나가는 길은 낙동강변 홍티[虹峙]마을로 이어지고, 서문에서 나가는 길은 서평포진(西平浦鎭)을 거쳐 부산진(釜山鎭)으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남문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한 갈래는 다대진의 선박을 수리하는 선소(船所)와 전선(戰船)이 정박하는 선창을 지나 몰운대(沒雲臺)로 이어지고, 한 갈래는 서평포진 선소와 선창을 지나 감천동을 경유하여 부산진으로 가는 길이다. 서평포진은 수군 만호영으로, 처음에 오늘날 사하구 구평동 일대에 있다가 다대진 가까이 이전한 진영이다. 그러므로 서평포진 선소와 선창은 다대진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대진지도」에는 없지만 서남쪽의 간문(間門)도 있었다.

『다대진 각방 중기책(多大鎭各房重記冊)』[1893년]에는 조선 말기 다대진의 행정, 문서와 서적, 건물, 물품, 재정, 무기 등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다대진성 안팎에 있던 건물은 객사(客舍), 동헌(東軒), 유포고(留布庫), 대동고(大同庫),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무사청(武士廳), 교사청(敎師廳), 포수청(砲手廳), 수성청(守城廳), 도훈도청(都訓導廳), 이청(吏廳), 호방소(戶房所) 및 형리청(刑吏廳), 통인방(通引房), 사령방(使令房), 군기소(軍器所, 청상루(淸箱樓)), 화약고(火藥庫), 공인청(工人廳) 등으로 수군 진영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외 윤흥신 장군을 모신 윤공단(尹公壇), 목장의 창고인 근목당(近牧堂), 선소의 진남정(鎭南亭) 등이 있었다.

이들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것은 국왕의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는 객사이다. 다대포 객사에는 회원관(懷遠館)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멀리서 오는 손님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다. 다대진은 부산에서도 가장 남쪽 육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회원관을 찾아온 시인의 시 속에는 ‘맑은 날 다대진에서 일본이 보인다’, ‘일본이 가깝다’라는 싯구를 많이 남길 정도로 일본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실제 조선 시대 다대진은 일본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1417년 “다대포는 경상좌도와 우도 중앙에 있는데, 왜적과 바라보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여 다대포가 만호가 있는 군영으로 승격한다. 그리고 1544년 왜구가 통영 앞의 사량진(蛇梁鎭)을 공격했던 사량진왜변 이후, 경상도 수군 강화책에 따라서 첨사영으로 승격되었다. 『다대진지(多大鎭誌)』에는 목도(木島)로 들어온 왜적을 소탕한 공으로 첨사영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다대진은 일본인의 표류와도 관련이 깊다. 해류와 강풍으로 일본 선박이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에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표류한 일본인이 대마도 사람이면 조선측에서 간단한 조사를 마친 후에는 왜관으로 보내고, 대마도 외 다른 지역 사람이면 왜관이 아닌 다른 곳에 선박을 계류시키고 조사하였다. 경상우도쪽으로 표류한 경우 일본인과 그 선박을 우선 다대진으로 견인해 와서 조선측에서 조사하고, 왜관측에서도 같이 조사를 하였다. 왜관에서 다대포까지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식 허가를 받은 일본인 외 무단으로 출입하는 일본인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의 요청에 의해 대마도 외 지역의 표류민은 1707년 이후 우암동으로 데리고 와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다대진은 경상우도쪽에서 오는 표류 선박이 우암동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공간이었다.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은 다대진첨사가 근무하는 동헌이다. 동헌에는 수호각(睡虎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1728년 12월 다대포첨사로 임명받은 권순성(權順性)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이었다. 수호각은 잠자는 호랑이가 지키는 곳이란 의미이다. 호랑이가 지키는 곳이니 왜적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잠자는 호랑이이므로 사람을 함부로 물지 않을 것이므로, 진영의 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평화를 지향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대진 동헌은 1895년 군제 개혁으로 다대진이 폐진(廢鎭)된 이후 오랫동안 잊혀진 건물이었다. 1970년 다대초등학교[당시는 다대국민학교] 건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몰운대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부산직할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때 ‘다대포 객사’로 잘못 지정되어 오랫동안 다대진의 객사 건물로 알려져 있었다. 2020년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를 ‘다대진 동헌’으로 수정, 지정하면서 그 이름을 되찾았다.

[의의와 평가]
도시 개발, 도시철도 공사 등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지만 다대진성의 성곽이 현재 다대동 곳곳에 남아 있다.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연결하는 수군의 요충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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