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우리 동네 굽이굽이 묻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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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정 새마을에 정착한 사람들현재 부산 사하구 괴정동은 괴정 시장과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사하 지역에서 가장 인파가 많은 곳이며 사하구에 살면 이곳 근처를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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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감동 용사촌 사람들이 경험한 세상부산광역시 북구 덕천여자중학교 인근 주택에 거주하고 계시는 박원호 어르신은 1933년 구미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익의 대립, 6·25 전쟁을 몸소 겪으신 분이다. 특히 6·25 전쟁 자원입대로 참전하여 북한군과의 전투 도중 큰 부상을 입으시고 부산에 있는 후송 병원에서 1950년대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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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과 어울려 살아온 할머니부산에는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 사이사이로 집을 만들어 삶터로 바꾼 마을들이 적지 않다.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돌산 마을로 불리는 곳도 그중 한 곳이다. 부산진구 전포동 방면에서 바라보면 황령산 방면으로 커다란 바위산이 보인다. ‘돌산’이라 한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전포동 방면에서 접근하기에는 급경사인 반면 문현동에서 접근하면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돌산 마을의 정확한 행정 구역은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 1동 15통이다. 이 마을의 명칭은 돌산 마을 외에 얼마 전까지 ‘문현동 안동네’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문화 사업으로 진행된 벽화 그리기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벽화 거리 마을’로 변경되었다. 돌산 마을이나 안동네라는 명칭은 마을 사람들보다 외부인이 즐겨 부른 명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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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 건설을 반대한 아미동 조선 사람들조선 시대 변방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부산은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도시다. 개항 이후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은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도시를 만들어 나갔다. 도로망을 계획하고 관공서를 배치했으며 병원과 상점을 열었다. 해안을 매축하고 전차를 운행하여 시가지를 확장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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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 주민들의 정착기서동은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윤산, 앞으로는 중군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으로는 사천을 경계로 해운대구 석대동과 접하고 서쪽은 고개 너머 부곡동, 북쪽은 회동동, 남쪽은 동래구 명장동과 접한다. 1740년(영조 16)의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동면 서동으로 나온다. 훗날 동면이 동상면과 동하면으로 분리되면서 동상면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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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장항 주민들의 망향가작은 섬마을이었다. 일주 도로도 없고, 뭍을 오가는 연락선만이 유일한 세상과의 연결고리였던 섬에서도 마을은 북쪽 한 귀퉁이에 동그랗게 웅크려 있었다. 마을이 생긴 건 아주 먼 옛날, 그 내력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두 그루는 팽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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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괴정 새마을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슬픔우암동(牛岩洞)은 부산광역시 남구의 서쪽에 있으며, 동쪽은 대연동, 서쪽은 동구 범일동, 남쪽은 감만동, 북쪽은 문현동·대연동과 접해 있다. 예로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이 포구 안의 언덕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소와 같다고 하여 우암포(牛岩浦)라고 하였다. 이후 1930년대 적기만 매축 공사(赤崎灣埋築工事)[제7 부두 일대]로 이곳에 항구가 들어서고 이 마을의 상징인 소 모양의 큰 바위는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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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신도시를 바라보는 토박이의 갈등고향 마을 언덕에 한옥을 짓고 있는 A씨를 만난 것은 7월로 넘어가는 햇살이 제법 덥게 느껴지던 때였다. 신도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울을 오르내리며 배운 기술로 혼자서 한옥을 짓고 있는 A씨에게 고향 정관은 어떤 곳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