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는 통신사, 부산에서는 어떻게 생활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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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9175
한자 日本-通信使-釜山-生活-
영어의미역 The life in Busan of government diplomatic missionaries to Japan
분야 생활·민속/생활,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심민정
[사행에 즈음하여]
나라에 바쳤으매 몸을 어찌 아끼랴,

멀리 떠나매 어버이의 그리움이 절로 깊구나.

그대 한강 위의 눈물로써,

나의 떠날 때 마음을 알리라.

돌아가는 구름을 바람이 다함없고,

촌초(寸草)의 읊조림을 견딜 수 없구나.

임금의 은혜가 하늘처럼 크시니,

효도를 옮겨 충성을 삼아 조그마한 정성을 힘쓰련다.

-남용익, 『부상록(扶桑錄)』

통신사(通信使)는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과 달리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그 때문에 바닷길에서 ‘언제 만날지 모를 위험에 대한 두려움’, 반면에 ‘나라에 대한 충성의 실천’이라는 양면에서 끊임없는 고민의 짐을 짊어지고 다녀와야 하는 사절이었다. 그래서 전후로 통신사들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에는 두려움과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를 이별에 대한 슬픔들이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란 일본과의 신의를 통하기 위해 조선 국왕의 명을 받고 파견되는 사신단을 가리킨다. 그 기원을 상고해 보면, 고려 말부터 우리 해안가를 약탈하던 왜구(倭寇)를 회유하여 백성들의 평안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신단을 꾸리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진년(壬辰年)에 시작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사신단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일본 관백(關白)의 직위 세습에 대한 축하, 다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런 두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된 시점에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교류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사절로 자리매김하였다.

어쨌든 나라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 통신사는 궂은 길을 마다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하지만 사신단의 최고 수장격인 삼사신[정사·부사·종사관]부터 가장 하급 관원인 격군(格軍)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행보에는 심리적 불안과 두려움이 배태되어 있다. 이런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기 위해 사신단들이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부산에 닿기 전까지, 또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는 순간에도 아주 융숭한 대접이 이어졌다.

사신단들이 부산에 이르기 전까지의 생활이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분명히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바다를 마주하고 섰을 때 느끼는 감정, 배를 타고 일본이라는 낯선 땅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그들의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머무르며 접하게 되는 여러 풍경 및 상황들을 그리는 것 또한 사신들의 일상 속 또 다른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자, 그럼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통해 부산에서 일상을 만들어 갔던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동래와 부산진에서 맞이하는 행렬, 그들의 ‘축제’]
통신사들에게 동래부, 부산이라는 곳은 만감이 교차하는 장소였다. 국왕에게 하직하고 여러 지역들을 거쳐 내려오면서 베풀어 주는 연회를 맘껏 즐기기도 하고, 지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회포를 풀기도 하지만 막상 용당(龍堂)에서 동래부로 들어가는 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먼 이역으로 떠나야 함이 실감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행렬을 맞아 주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일상은 또 다른 안도감 속으로 그들을 끌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모습은 부산 지역민들의 지공(支供) 및 인사들까지 동원되어 치러지는 행렬맞이, 전별연(餞別宴)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치러지는 통신사맞이 행렬, 전별연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여러 사신들의 사행 기록을 토대로 그들의 눈과 마음에서 그려지는 풍경과 감흥을 가상의 스토리로 엮어 내용을 전개해 보았다.

동래부 경계에 이르자 고을 사람, 장교, 아전, 백성, 승려 등 수백 명이 기다리다가 사신 행렬이 가는 길을 위로해 주므로 잠시 수레를 멈추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최근 흉년이 잦아 이전에 잔치를 베풀어 주던 충주·안동·경주 등지에서는 이 모든 의례를 생략할 정도인데, 동래부는 금년 농사가 어떠한가 물어보니 지난해보다 조금 낫다고 한다. 변방의 백성으로 통신사 행렬뿐 아니라 왜관(倭館)으로 오는 일본 사신들 접대 물목 마련까지 부담이 심한데, 그나마 어느 정도 곤란을 면하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래관에서 5리[약 1.96㎞]쯤 떨어진 손달리(孫達里)에 이르니 동래 부사가 의장을 갖추고 길가에서 장막을 치고 국서(國書)를 맞이하여 용정자(龍亭子)에 담는다. 이어 동래 부사 의장이 풍악을 울리며 앞에서 인도하자, 사신 일행은 바다를 건널 군물(軍物) 및 나졸(羅卒)과 전배(前排)를 갖추어 그 뒤에 늘어섰다. 오늘은 풍악을 울리지만 국기일(國忌日)에는 풍악을 울리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이어 정사·부사·종사관이 단령(團領)을 갖추고 원역(員役)들은 각기 정복을 입고 반차(班次)를 정돈하여 천천히 동래성 남문에 들어서니, 좌우 길 옆에 구경하는 사람이 몇 천인지 알 수 없었다.

수령(守令)은 국서를 객사(客舍)에 모시고 문상례(問上禮)를 행하였는데, 풍악을 울리기 전후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끝냈다. 국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칙서를 맞을 때와 같은데, 우선 국서를 북쪽 벽에 봉안한 뒤 삼사신은 동쪽 벽에 나란히 선다. 이어 첨사(僉使) 이하 모든 사람들이 숙배하고 공사(公私) 간의 예를 행한다. 숙배례가 끝나고 부산진으로 가기 전 동래 객사에서 머무는 동안 좌수사, 부산 첨사, 장교, 관속들과 기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삼사신이 거느리는 군관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그 뒤를 삼사신과 각 원역들이 뒤따르게 하여 부산진으로 가는 행렬을 갖추었다. 사신단이 음악을 울리면서 행렬을 이어 가니 길마다 구경꾼들이 시장처럼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음식을 싸 가지고 구경 온 자도 있었다.

부산진에서 10리[약 3.93㎞]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기치(旗幟)와 검극(劍戟)이 먼저 사신단을 맞이하였다. 5리 밖에 이르자 김해 부사(金海府使), 초계 군수(草溪郡守), 창원 부사(昌原府使), 함안 군수(咸安郡守), 의령 현감(宜寧縣監), 사천 현감(泗川縣監), 부산 첨사(釜山僉使), 칠포 만호(漆浦萬戶) 등 각 고을 수령과 군관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우리를 맞이하여 국서를 모시고 인도하였는데, 그 위의(威儀)는 한결같이 동래부에 들어갈 때와 같았다.

문상례를 마치자 좌수사가 베풀어 주는 잔치가 이어졌다. 삼사신이 단령을 갖추어 입고 수사와 마주앉자 일행의 원역, 군관, 서기 등이 차례로 각각의 직위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벌여 앉았다. 음악이 울리고 상에 한가득 맛난 음식들이 나오자 일시에 술을 따르고 모두 다 꽃을 꽂았다. 여기에 경주·동래·밀양 등지에서 차출되어 온 기생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자 일행은 모두 흥이 올라 취기가 어렸다. 화려한 잔치에 어찌 인파가 빠질 수 있겠는가? 어느새 성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들로 가득 찼고, 밤중이 되어서야 잔치가 파하였다. 정사·부사·종사관은 각각 부산성의 동헌(東軒)·서헌(書軒)·진헌(鎭軒)에 거처를 정하였고, 나머지 원역들은 성 밖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부산진에서 보내는 일상]
사신의 일상은 원행을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사신 일행은 동래부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부산성 주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왜관이 부산성과 가까이 있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들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오래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급 원역들은 부산성 근처의 민가에 유숙하면서 개인 물품을 준비하기도 하고 지역의 먹거리와 놀거리를 즐길 여유가 있지만, 삼사신과 상급 원역들은 공무를 보고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성 내에서의 생활을 벗어나기 힘들다. 부산성에서 머무는 삼사신의 일상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사행 업무, 부산성 구경, 휴식, 작별 인사와 주연(酒宴) 등이 되지 않을까? 이들의 일상을 잠깐 엿보도록 하자.

1. 사행 업무 점검

부산에서 점검해야 할 사행 업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갈 배들을 살펴보고, 배에 실을 물목과 함께 갈 인원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업무는 한 차례로 끝나지 않는다. 즉 일본 측에서 인원의 감축을 요구하기도 하고, 새로운 물목을 구청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항상 변동 사항을 점검해야 하였다. 이런 활동은 사행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산에 도착한 내용을 장계로 올리고, 오후에 선창으로 가서 도해선(渡海船)을 살펴보았다. 기선(騎船)은 통영에서 새로 만들고 복선(卜船)은 수영에서 만들었는데, 기선의 선상(船上)에는 좌우로 화란(畫欄)이 있고 난간 밖에는 홍주장(紅紬帳)을 드리웠으며, 중간층에는 판옥(板屋)이 15간인데, 왼편의 제1간은 즉 상방(上房)이다. 그 위에는 타루(柁樓)·조란(雕欄)으로 되어 있고, 층층의 계단에는 단청이 휘황하게 비친다.

또 차일(遮日)과 군막(軍幕), 병풍과 의자를 설치한 사신이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망루(望樓)가 마련되어 있다. 전후의 두 돛대의 높이는 각각 15장(丈) 남짓한데, 그 위에 표기(標旗)를 세우고 또 장대를 세워 선호(船號)의 정(正)·부(副) 등의 글자를 게시하였다. 복선에는 군막을 설치하지 아니하고, 범석(帆席)은 백목(白木)에 청색의 선을 둘러서 만들었는데, 각각 정복(正卜)·부복(副卜) 등의 글자로 선호(船號)를 게시하였다.

며칠 후 승선도 해 볼 겸 삼사신이 각각 기선을 타고 절영도(絶影島) 근처에 가서 전복 캐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런 풍경은 바다를 접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번 사행에 참여하는 격군 중에는 포작인(鮑作人)도 포함되어 있을 터이니,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 사행 길에서도 이들이 캐어 주는 왜 전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왜 전복은 국왕에게 진상할 정도이니 그 맛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오늘은 삼사신이 객사에 함께 모여서 예단과 복물(卜物)을 점검하고 다시 포장하였다. 그리고 이번 사행의 일행이 거의 500명이나 되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 사행원들에게 일러 둘 금제(禁制) 조항을 다시 정리하였다. 전후 통신사행 때의 금제 조항을 상고하여 복잡한 사항은 삭제하고 미비한 점은 보충하여 하나로 합쳐 금제조(禁制條)·약속조(約束條)라 이름 하여 각색(各色)의 원역들에게 타이르고 또 언문으로 써서 아래의 모든 노졸(奴卒)에게도 알려 두었다.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인데, 사행 기간 동안 아무쪼록 무탈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부산성을 둘러보며

산 모양이 가마처럼 놓였는데[山勢亞如釜]

성문이 물을 향해 열렸구나[城門臨水開]

인연(人煙)은 옛날의 내국(萊國)이요[人煙古萊國]

형승은 저기 저 태종대[形勝太宗臺]

섬들이 하늘 끝에 멀리 보이고[島嶼連天遠]

물결은 땅을 뒤흔드는 듯 몰아오네[波濤拔地廻]

사절들 여기 와 머물면서[使華留滯日]

경치를 구경하며 함께 서성거리네[登眺共徘徊].

-신유, 『해사록(海槎錄)』 중

앞의 글은 부산성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성문이 바다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나, 현재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증산의 모습, 절영도의 태종대(太宗臺)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바다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이전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현재에도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부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이 접수하여 왜성(倭城) 형태로 개조하기도 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조선에서 개·보수를 하여 수군진의 성곽으로 거듭났다. 통신사들도 이러한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는데다가 일본으로 배를 띄우기 전까지 대다수의 시일을 부산에서 기거하며 보내기 때문에 그동안 부산성을 둘러보는 일은 이들의 일상에서 빠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낮에 삼사신이 함께 부산성에 올랐다. 성은 곧 일본인이 쌓은 것인데 외딴 봉우리가 바다 어귀에 우뚝 솟았고, 고깃배가 점점이 떠 있는 앞쪽으로 절영도가 마주 보인다. 절영도 밖으로 섬이 길에 늘어서 있는 게 희미하게 보이므로 그 지역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는 대마도(對馬島)로 맑은 날에는 이처럼 선명하게 보입니다’라고 한다. 북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고분(古墳)이 있는데, 곧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始祖) 무덤으로 이것은 안쪽 안산(案山)이고, 절영도가 바깥 안산이라 한다.”

부산성을 올라 주변을 둘러보는 사신들의 모습에서 부산성의 입지가 어떠한지 느껴진다. 즉 부산성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해상전을 고려한 입지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대마도의 모습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일본을 경계하는 인식이 뚜렷이 보이는 성곽인 것이다. 이는 통신사라는 사절이 단지 국서를 교환하는 외교 사절, 문화 교류의 사절만이 아니라 국방·안보 임무도 소홀이 할 수 없는 사절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일면이다. 일본과 경계한 부산에서의 사절단의 일상은 의기를 다지기에도 충분한 장소인 것이다.

2. 작별 인사와 주연

사신 일행들은 부산의 객관에 머무르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또 사신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찾아오는 친분 있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주변에서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주로 경상도 지역의 부사, 첨사, 군수 등]도 사신 일행이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원하며 인사를 오는 일도 상례처럼 행해졌다. 이처럼 부산 객관은 사신들의 휴식처이자 인사를 나누는 장소, 사신들이 출발을 준비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하였다.

빈관(賓館)에 묵으면서 이별을 아끼니,

그대 나를 전송하려 멀리 멀리 왔네 그려!

교칠(膠漆)보다 깊은 정을 뉘라서 떼 놓으리?

흥 다해도 술잔은 다시 천천히 돌아가네.

푸른 바다에 비는 개어 가는 배 멀리 뵈고,

붉은 성에 바람이 세찬데 각(角) 소리 슬프구나.

내일 아침 돌아보면 상거(相距)가 천리지만,

꿈에라도 서로 만나 회포를 위로하세.

-신유, 『해사록』

객관에 인사를 전하러 오는 이들은 때로 하루나 이틀을 묵으면서 사사로이 주연을 베풀고 돌아가기도 한다. 통신사선을 타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가야하고, 혹 큰 풍랑을 만나면 생사가 어찌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랏일을 도모하기 위해 선상에 오르는 것이므로 이런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것. 그 때문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포를 나누는 일은 빠질 수 없는 의례였다.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연회는 때로는 소소하게, 때로는 경상도 지역의 기생들을 다 동원하여 풍악까지 갖출 만큼 화려하게 치러지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통제사의 전선(戰船)이나 정원루, 영가대(永嘉臺) 등지에서 이색적인 연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사신단 일행의 고충이나 마음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치러지는 작은 연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반면 그 많은 음식과 물자를 영남 지역 71개 고을이 담당하니 그 고충도 헤아려 볼 만하다. 지공을 담당하기 위해 수백 리 밖에서 수송을 하여야 하는 불편함, 40~50여 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감당해야 하는 수고로움, 그로써 발생하는 폐단 등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1763년(영조 39) 사행 때 부산 사람들은 “이번 행차에 지공할 가가(假家)를 마련하고 가마·솥·그릇 등을 갖추는 하루의 세(貰)가 100여 금(金)이 넘게 들었다”라고 할 정도이니, 통신사들의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감당해야 하였던 지역민들의 고통의 일면도 바라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3. 부산 명소 유람

사신단들은 대체로 배를 띄우기 전 부산에서 40~50여 일을 머물렀다. 이렇게 머무는 동안 대체로 본연의 업무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즉 사행 준비, 해신제(海神祭) 등 제례 준비, 업무 보고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배가 출발하려면 해류나 바람 등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부산에서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업무 외에 휴식을 하며 긴장감을 늦추기도 하였지만, 부산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치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부산의 절경이나 특별한 일상을 즐기기 위해 이들에게 할애되는 시간은 동래부에서 머무는 시간, 부산진에서 머무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를 띄운 뒤 바람 등을 기다리며 기타 해안 주변에서 머무는 시간 등으로 삼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간 동안 사신들이 즐겨 찾는 부산의 명소들이 있었다. 대체로 동래부와 가까운 지역으로 동래 정씨 관련 유적과 학소대(鶴巢臺)·금정산성 등이 있었고, 기타 해안가 명소는 다대포진이 있던 몰운대(沒雲臺)와 개운진의 과해정 등지였다. 그 외의 대부분 경승지는 부산진 주변이었는데, 영가대·태종대·해운대(海雲臺)·만공단 등과 왜관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곳을 다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가장 인기를 얻었던 부산의 명소 몇 군데와 그곳에서 일상을 장식하였던 사신들의 모습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1) 동래 정씨 관련 유적 방문

합포의 구슬이 다 돌아온 줄 들었노니

조정에서 미구(微軀)의 이 늙은이 부르시리

역사에 아직도 사절로 갔던 일을 전하니

우리 가문에 예로부터 사행의 재주 있었더니

기구(箕裘)는 주시(周詩)에 이른 바를 잇지 못하여

장보(章甫)는 도리어 월속(越俗)의 시기를 부를까 하네.

대마도는 창해(滄海)의 해를 토하였다 삼켰다 하고

경파(鯨波)가 출렁이니 벽공(碧空)에 뇌성이 이는 듯

이번 길에 오직 왕령(王靈)만 믿고 가노니,

가벼운 배 혹시 무슨 일 있을까 두렵지 않네.

-신유, 『해사록』

앞의 시는 동래(東萊) 사군(使君) 정유성(鄭維城)의 시로, 정유성은 동래 정씨이면서 동래 부사를 역임하였다. 부산 지방에서 동래 정씨 일가는 지역 유지로서 오랜 기간 실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신사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부산이었기 때문에 당시 세가를 형성한 동래 정씨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지역에 머무는 사신들에게 작은 연향을 베풀어 위로를 한다든지 준비 과정이나 지공 등에 소요되는 물품이나 인력들을 조달하는 일에도 일정 부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인사들은 직접 사행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동래 정씨의 이런 모습들을 생각해 볼 때 이들 가문과 관련된 장소, 흔적이 남겨진 곳을 사행 구성원들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동래 정씨의 시조 묘인 정문도(鄭文道) 묘를 가장 많이 찾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후에 동지(同志) 성백규(成伯圭)·이석여(李錫予)와 함께 화지산(華池山) 만세암(萬世庵)[현 화지사(華池寺)]에 가 보았다. 소나무와 전나무 꽃과 대나무가 다투어 자라서 산에 가득하다. 앞에는 평야가 놓여 있고 밖에는 큰 바다가 펼쳐 있다. 뜰 앞에 있는 귤나무에 푸른 잎이 듬성듬성 나 있고 푸른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암자의 북쪽 기슭은 바로 옛날 본부(本府)의 호장(戶長) 정문도의 묘지다. 지맥이 화지산으로부터 구불거리며 들어와 우뚝 솟았다가 빙 돌아 다시 하나의 기다란 유혈(乳穴)을 이룬 명당(明堂)이었다. 청룡과 백호는 몇 리를 휘감았다. 내당(內堂)의 물은 빙빙 돌아서 동구로 나갔다가 도로 백호를 돌아 바다로 들어갔다. 앞뒤에는 도와주는 산들이 둘러쌌는데 큰 바닷물 한 줄기가 특히 명당을 향하여 들어오는 듯하다. 앞에는 큰 들이 펼쳐져 있고, 외청룡·외백호는 큰 산으로 내달아 있어 은연히 누워 있는 용과 쭈그리고 있는 범과 같다. 바닷속의 절영도는 그 외안(外案)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이 묘의 기이한 모양이다. 일찍부터 익히 듣기는 하였지만 한 번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올라가 보니 과연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

이 글은 지리적으로 명당에 입지한 동래 정씨 시조 묘를 확인시켜 준다. 그만큼 지역 내에서 굳건한 입지를 갖춘 세가인 셈이다. 그 때문에 이곳을 단순한 명소로 보고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행원들이 부산 지역에서 머무는 동안 무탈하기를 바라며 지역 내에서 동래 정씨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참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반 후 동래 정씨 시조의 묘를 찾아가 참배하는데, 본부에서 다례상(茶禮床)을 간략히 차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두 아들과 홍헌(弘憲)도 따라갔다. 묘는 동래부에서 6~7리[약 2.36~2.75㎞], 부산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묘 앞에 작은 비석(碑石)에는 ‘동래 정씨 시조 호장 정문도 지묘(東萊鄭氏始祖戶長鄭文道之墓)’라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정지연(鄭芝衍)이 감사로 있을 때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파손되었는데, 그 후 정사호(鄭賜湖)가 방백으로 와서 중수(重修)한 것이라 한다. 곧 묘 아래 거주하는 사람을 산지기로 삼아 묘를 수호하게 한 다음, 제사의 퇴물을 나눠 주게 하고 바로 돌아왔다.”

2) 몰운대·해운대·영가대·태종대

부산 지역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에 대(臺)가 많이 있다. 몰운대·해운대·영가대·태종대 외에 학소대, 자성대, 이기대, 신선대, 의상대, 오륜대, 강선대, 겸호대 등을 포함하여 ‘부산 8대’, 혹은 ‘부산 12대’로 명명하기도 한다. 아마도 부산은 산, 강, 바다를 모두 접하고 있어 절경이 뛰어난 지역이기에 그 경치를 관람하기 위한 장소들이 명소로 이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장소들을 사행원들이 모두 둘러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로 배가 뜨기 전에 머무른 부산진 지역을 중심으로 근처의 이름난 대를 둘러보는 정도로 여유를 즐겼다. 앞에서 제시한 대들은 모두 부산진과의 ‘근접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뛰어난 절경까지 갖추고 있으니 이를 보고 금상첨화라는 말을 쓰는 것일 터이다. 이 장소들을 중심으로 통신사들이 만끽하였을 일상 속의 금쪽같은 여유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본다.

오뚝오뚝 높은 대가 바다 위에 떴는데

산허리엔 사철 흰 구름이 머물러 있네.

옥경(玉京)이 예서부터 그리 멀지 않으리니

하필 선사(仙槎) 타고 두우(斗牛)를 범하랴.

-신유, 『해사록』 중 「몰운대」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의 가장 남쪽에서 바다와 맞닿는 곳에 있다. 이곳은 16세기까지는 몰운도라는 섬이었으나, 그 후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여 다대포와 연결되며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지형상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안개와 구름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몰운대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몰운대 앞바다는 조선 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시기에는 격전이 벌어지기도 한 곳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었던 충장공 정운(鄭運)도 이 앞 바다에서 500여 척의 왜선을 맞아 싸우다가 순국하는 등 역사의 한 장면이 연출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인 내막을 모를 리 없는 통신사들이었기에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몰운대를 찾았다가 뛰어난 경치에 반하여 재차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 번은 멀리서나마 살펴보기 위해 땅을 밟아 가고, 또 한 번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보기도 하였다. 특히나 몰운대해운대는 이곳을 찾아본 사행원들의 입에 여러 차례 오르내린 경승지였기 때문에 어느 곳이 더 절경인가로 의견을 다투기도 하였다.

“동래에 해운대·몰운대 두 대가 있는데, 몰운대는 다대진(多大鎭) 오른쪽에 있고 해운대는 좌수영 왼쪽에 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것이 낫다느니 저것이 낫다느니 하여, 자못 영남루(嶺南樓)가 촉석루(矗石樓)보다 낫다느니, 촉석루가 영남루보다 낫다느니 하는 것과 같았다. 대개 몰운대는 앞에 벌여 있는 작은 섬들이 아늑하게 아름답고 고와서 마치 아름다운 여자가 화초밭 속에 화장하고 있는 것 같다. 해운대는 대 앞에 암석이 삼면을 둘러싸서 층층 나고 굽이져 천 명쯤 앉을 만하며, 전면이 광활하여 바로 대마도와 맞대고 중간에 한 가지 물건도 가린 것이 없다. 그래서 마치 헌칠한 장부(丈夫)가 흉금(胸襟)을 드러내 놓고 천만 가지 형상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전후의 시인이나 과객이 두 대를 논평한 것이 나의 이 견해와 맞는지 알 수 없다.”

사행원들에게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또 다른 장소, 해운대. 이곳은 여기 대를 만들었다고 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자를 따서 이름 지은 곳으로, 현재 이 주변은 동백섬이라고 불린다.

고운이 독학(獨鶴)처럼 예서 유유(悠悠)히 가

요슬(瑤瑟) 안고 천 년을 선계(仙界)에서 놀았다네.

지금 옛 대엔 동백나무만 남아서

온종일 나는 꽃이 가는 배를 쫓는구나.

-신유, 『해사록』「해운대(海雲臺)」

한편 영가대태종대몰운대해운대보다 부산진 지역에 훨씬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여흥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통신사들이 이곳을 찾을 때에는 음식과 술, 음악과 더불어 기생들을 동원하여 춤까지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부산진성과도 가까운 곳이라 부산진 첨사가 수군진들과 함께 직접 접대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그래서 “저녁에 세 사신이 같이 영가대에 올라 달을 구경하며 기악(妓樂)을 베풀고 두어 순배 술을 들다가 파하고 돌아왔다”, “종사관 및 첨사와 더불어 수사의 전선을 타고 태종대에 가서 놀았는데, 대양(大洋)을 굽어보니 대마도가 바다 구름 사이에 아물거렸다. 달빛을 받으며 취해 돌아왔다”는 사행 기록처럼 첨사가 직접 작은 연회를 베풀어 준다든지 수군진의 배를 내어 바다에서 유람할 수 있는 배려를 해 주기도 하였다.

선가(仙駕) 어느 해에 이 땅에 오셨던고

지금토록 신물(神物)이 높은 대를 보호하네.

구름 사이에 이따금 생학(笙鶴) 소리 들리니

아마도 매고(枚皐)가 호종(扈從)하였다 돌아옴인가.

신유, 『해사록』「태종대」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언덕 밑 천길 물엔 돌 빛이 서리었네.

배들이 평온하여 큰 구렁에 숨겨진 듯

바다엔 온종일 물결이 뒤흔들어도.

-신유, 『해사록』 중 「영가대」

3) 영가대에서의 해신제와 전별연

통신사들이 부산에 도착하여 장계를 올리면, 예조에서는 배를 타기 좋은 길일을 택해 준다. 이 길일을 전후로 하여 바다 신에게 기풍제(祇風祭)를 지낸 후 의장과 국서를 갖춰 배에 오른다. 해신제를 지낸 후 바로 배가 일본으로 출발하는 적은 드물지만 일종의 의례로서 통신사선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통신사들에게 바다를 건너는 일은 극도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바다 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단순한 무사 기원 의식이 아니라 혈육과의 재회를 바라는, 무탈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기원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진중함을 엿볼 수 있는데, 제사를 지내기 3일쯤 전부터 영가대에 통신사 일행을 불러 모아 부정을 탈 만한 행위를 엄금하는 서약을 받는 것이 대표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서약문[서계문]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모년 모월 모일, 우리 6선(船)의 무리가 이 행역(行役)에서 장차 신명(神明)의 도움을 받으려 하니, 이제 관직의 품계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그 이하 도사(徒史)와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무릇 같은 배를 타고 건널 자는 제사에 참여하든 않든 오늘로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 냄새 나는 채소를 먹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문상·문병을 하지 않으며, 형살(刑殺) 문서를 보지 않고, 각각 고요한 방에 앉아서 일심으로 치재(致齋)하노니, 만약 서계(誓戒)대로 아니하면 반드시 하늘의 꾸중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맹세를 하고 난 뒤 2일 동안은 매사 모든 일에 경계하고, 하루 전에는 목욕재계하여 다음 날의 제례를 준비하였다. 사실상 제례 준비의 시작은 이렇게 서약을 맹세하는 3일 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맹세 후 이날 저녁부터 전사관(典祀官)이 여러 집사들을 거느리고 의식을 연습하는데, 그 자세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날 저녁부터 전사관이 여러 집사들을 거느리고 단(壇)에 가서 의식을 익히고, 연하여 영가대에서 합숙하여 재계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대 옆 작은 집에 앉아서 기구 씻는 것을 보았다. 동래 부사 서명연(徐明淵)이 아전을 보내어 제구(祭具)를 가져왔는데, 자리·장막·등촉(燈燭) 기물을 모두 새것으로 하였다. 제수(祭需)는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입쌀·찹쌀·기장쌀·피쌀 각 5되, 미나리김치·무김치·부추김치·죽순김치·사슴 젖·생선젓·식혜[醯] 각 2되, 녹포(鹿脯)·어포(魚脯) 각 10가닥, 대추·밤·개암[榛]·잣·호두 각 2되, 화갱(和羹) 3그릇, 예제(禮齊) 3동이, 촛불[蠟炬] 1쌍·용촉(龍燭) 30자루였고, 흰 모시 폐백[白苧幣] 12자는 광주리에 담았다. 오직 보궤(簠簋)·작(爵)·변두(籩豆)를 미처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밥은 큰 화자기(畫磁器) 사발에 담고 김치·젓·국은 중 사발에 담고 포(脯)와 과실은 백자(白磁) 접시에 담고 술잔은 중 사발과 같으면서 조금 작은 것 4개로 하고, 양(羊)·돼지[豕]는 칠한 나무그릇 2개에 담았다.

5일 새벽에 향(香)·축문·위판(位版)을 영가대에 봉안(奉安)해 놓고 저녁내 제수를 만들고 기구를 챙겼다. 6일 자시(子時) 초각(初刻)에 전사관이 재랑(齋郞)·축사(祝史)와 더불어 단에 올라가 진설(陳設)하고, 당상 역관 3명이 관디[冠帶]를 갖추고 가서 헌관을 청하여 조심스럽게 장문(帳門) 밖으로 나왔다. 전사관 이하 집사 및 참석한 전원이 각각 차서에 따라 바깥 자리에 앉았는데, 모두 흑단령(黑團領) 검은 사모에 은띠를 띠고, 오직 삼서기와 의원은 갓을 쓰고 유의(儒衣)에 유대(儒帶)를 띠었다.

축시(丑時) 초(初)에 집례(執禮)가 찬알(贊謁)·노창(臚唱)과 더불어 먼저 들어가 네 번 절하였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가 진설을 살펴보았고 대축(大祝)이 위판을 받들어 탁자 위에 갖다 놓자, 서판관(書版官)이 조심스럽게 붓을 잡아 대해신위(大海神位)라 쓰고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봉심(奉審)한 뒤 대축이 위판을 신좌(神座)에 봉안하고, 헌관은 다시 문밖으로 나왔다. 여러 집사로 하여금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에 손 씻고 각각 일을 보게 하고, 알자가 나와서 삼헌관을 인도하여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네 번 절하되 서쪽으로 향하고, 참석한 전원이 또한 따라 들어가 북으로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절이 끝나자 전폐례(典幣禮)를 행하는데,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손 씻고 남쪽 계단으로 올라가 꿇어 앉아 향을 올리고, 대축이 폐백 광주리를 들이자 헌관이 받아서 올리고 엎드렸다 일어나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헌관 자리로 돌아왔다. 초헌례를 행하는데, 인도하여 손 씻는 것을 처음과 같이하고 준소(尊所)에 나아가 잔을 살폈으며 재랑 이하가 잔을 들고 따라가 신위 앞에 가서 받들어 올렸다. 헌관이 조금 물러나 꿇어앉자, 대축(大祝)이 종헌관의 왼편에서 축문을 읽었다. [중략]

읽기를 마치자, 초헌관이 내려왔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하였다. 손 씻는 것과 오르고 내리는 것은 모두 처음과 같이하였다.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하는 자리에 나아가자, 대축이 술잔을 들고 재랑이 포를 들어 올렸다. 헌관이 마시기를 마치고 포를 받아 내려와서 네 번 절하였다. 대축이 서쪽 계단을 올라가 철상(撤床)하였다. 헌관이 망예위(望瘞位)에 나아가자, 대축은 축문과 폐백을 받들고 재랑은 양·돼지·기장밥·피밥을 받들고 배를 타고 바다를 두어 1리[약 0.39㎞] 남짓 나가 물에 띄우고 돌아와 단 남쪽 절하는 자리로 가서 여러 집사들과 더불어 네 번 절하였다. 예가 끝나자, 불을 받들어 위판을 불사르고 나서 파하였다.”

대개 의식이 끝나면 일정 시간 휴식을 가진 뒤 통신사 일행은 좌수사가 베풀어 주는 전별연을 받는다. 전별연은 원래 충주·안동·경주를 포함하여 총 네 군데에서 치러졌지만 이상 기후 등으로 경제 상황이 피폐해진 후에는 부산 한 군데에서만 치르고 잔칫상에도 술 대신 차(茶)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형식과 횟수를 간소화한다고 해서 통신사들에 대한 접대가 소홀하지는 않았다. 통신사는 국왕의 명을 받은 국왕 사절인데다가 위험을 감수하고 일본으로 가는 사절이기 때문에 접대는 대체로 성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세 사신 및 일행의 원역들이 객사에 일제히 모였는데, 청사(廳舍)가 좁아서 임시로 넓은 자리를 만들고 기악을 크게 베풀었다. 사신과 좌수사는 주객의 자리에 나눠 앉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차례대로 좌정하여 자리를 정돈한 다음에 상을 받았는데, 매우 융숭한 차림이었다. 차로 술을 대신하여 9잔 7미(九盞七味)[성대한 잔치를 이름]의 예를 행하였다. 누구나 다 머리에 채화(彩花) 한 가지씩을 꽂고 배가 부르도록 상에 가득한 음식을 먹으며, 임금이 주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고 임금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니 기꺼운 나머지 나그네의 괴로움을 아주 잊었다.

공적인 연회가 끝난 뒤에 이어서 수사가 사연(私宴)을 베풀었는데, 여러 풍악이 교대로 연주되고 군무(群舞)가 일제히 벌어졌으며 청사초롱이 벽마다 걸려 마치 대낮과 같고, 상 위에 벌여 놓은 꽃병이 완연(宛然)하게 봄 동산과 같아 또한 하나의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해신제 후의 전별연과 수사의 사연은 통신사 행렬이 국서를 가지고 부산 지방으로 처음 온 이후로 또 한 번 맞게 되는 큰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성대한 음식과 무악(舞樂)에 취한 사신단들의 모습은 그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부산 지역민들에게도 걱정과 시름을 내려놓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통신사들과 함께하는 두 번째 잔치가 그렇게 달빛 어린 밤을 수놓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배를 띄운 후-바람을 기다리며 보내는 일상]
예조에서 택일해 준 배를 타기 좋은 날, 이날에 배가 바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이날은 사실상 통신사선이 바다에서 안정적으로 운행할 수 있을지 시험하는 날에 불과하다. 해당 일자에 통신 삼사신은 국서가 담긴 용정자를 받들고 배 위에 기치를 진열하여 대취타(大吹打)를 울리며 일본으로 들어가는 의례를 시연한다. 이때 부산 첨사와 수사의 전선이 도열하는 가운데 통신사선은 바다 밖 약 1.96~3.93㎞[5~10리]까지 나갔다 돌아온다.

사실 택일해 준 날에 배를 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바다라는 공간이 육지처럼 늘 그곳에 있어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바람과 해류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신사선이 대마도로 들어가기 전 알맞은 바람과 해류를 기다리는 시일도 많이 소요되어 어떤 때는 두 달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기다림이 긴 경우에는 사신단들도 휴식과 주변 유람으로 일상을 보내기도 하였다.

대개 발선하기 직전 언저리에는 사신들이 초량의 빈일헌에 기거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낸다. 이는 통신사선을 호송하는 일을 대마도인들이 담당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기거하는 동안은 사신단들이 왜관 주변을 둘러보거나 왜관 안으로 들어가 호송 왜인의 간소한 접대를 받기도 한다.

“이날은 바로 왜관에 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이석여와 작반하여 왜관에 들어가 피차간에 시장을 여는 것[開市]을 보았다. 교활한 왜인들이 물건을 검사하여 퇴하고 사지 않는 꼴이란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다. 훈도 변 당상(卞堂上)을 따라서 한 대관(代官)이 사는 곳에 가 보았다. 좌정하는 즉시로 키가 크고 사랑스러운 어린 왜인 2명이 각각 점심을 내오는데 음식과 그릇이 몹시 정결하다. 밥을 다 먹기 전에 한 아이가 또 붉은 술잔을 가져다가 사람 앞에 각각 놓더니, 딴 아이 하나가 술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따른다. 대관이란 자가 아주 간곡하게 권해서 굳이 사양해도 끝내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지나온 말을 들으며 그가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술잔을 입에 댄 뒤 일부러 국그릇에 기울여 쏟았더니, 권하던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는 더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땅을 밟으며 이런 일상의 여유를 부리기도 잠시, 일본 뱃사람이 배를 띄워야 한다는 소식을 알려 오면 남은 짐도 제대로 챙길 시간 없이 배를 향하여 달려야 한다. 배가 출발하는 순간은 이전의 축제 같은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느새 이별의 인사와 눈물로 채워진다.

“왜 사공(倭沙工)이 와서 고(告)하기를, ‘바람이 바야흐로 순하니, 사행은 배를 띄우셔야 하겠습니다’ 하므로, 곧 발행 장계(發行狀啓)를 갖추어 발소(撥所)에 내다 부치고, 6선이 한꺼번에 닻을 올리니, 본진(本鎭)[부산진을 가리킴]의 첨사 및 지응(支應)하는 관원들이 황급히 와서 작별하였다. 각 선(各船)의 소속 중에는 동래·부산 사람이 많으므로, 배 아래에 와서 배웅하는 그들의 처자(妻子)와 겨레붙이의 울음소리가 잇달으니, 광경이 아주 슬펐다.”

이 울음소리들은 돌아오는 날이면 아마 기쁨의 소리로 바뀔 터. 한편 발선하고 난 이후라도 갑자기 바람이 좋지 않아 다른 해안으로 정박하여 대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옛 성이 모래 언덕에 가까우니[古壘近沙岸]

저녁 밀물이 수루에 맞닿누나[暮潮連戍樓]

새들은 연기인가 나무에 깃들였고[鳥棲煙際樹]

사람은 비 오는 배 안에 누워 있네[人臥雨中舟]

물나라엔 단풍 숲이 컴컴하고[水國楓林暗]

산밭엔 밀 이삭이 익었네[山田麥穗秋]

동으로 만 리 밖에 가는 길인데[東行萬里外]

예서 오래 묵자니 이 시름 어이하리[愁絶此淹留]

-신유, 『해사록』 중 「다대포에서 비오는 중에」

비가 와서 다대포에 배를 대고 머무는 사신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기를 기다리는 통신사들의 고단한 마음 또한 엿볼 수 있다. 해신제가 끝나고 좋은 바람에 배를 띄웠건만 곧바로 배가 대마도로 향할 수는 없는 상황. 배 안에서의 생활이 익숙하지 못한 사신단들의 고단함이 몇 갑절은 되었을 것이다.

오랜 기다림과 고된 시간을 거친 후 풍악이 울리는 선상에서 점점 멀어져 선으로만 남겨지는 부산의 해안선을 뒤로하며 통신사들은 자신들의 임무와 기대와 두려움을 가슴에 점점이 새긴다. 그들에게 한편으로는 위로를, 한편으로는 고국과의 이별을 안겨준 부산. 이곳은 통신사들이 일본에서 되돌아올 때에는 재회를 반가워하는 환희의 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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