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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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382
한자 朝鮮時報
영어의미역 The Joseon Sibo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보영

    [상세정보]

    성격 신문
    관련인물 다카키|아다치 겐조
    창간인 아다치 겐조
    창간 시기/일시 1894년 11월 21일연표보기 - 창간
    폐간|종간 시기/일시 1941년 5월연표보기 - 통폐합 정책에 따른 폐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19년 4월 10일 - 주식회사로 전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19년 12월 - 주식회사 해산, 휴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7월 - 합자회사로 재창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1월 10일 - 사옥 화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0년 2월 15일 - 사옥 화재
    제작|간행처 『조선 시보』 간행처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정의]
근대 부산에서 창간하여 발행한 『부산 상황』을 재창간한 일간지.

[창간 경위]
1892년 12월 5일 『부산 상황』이라는 신문이 창간되고, 이후 『동아 무역 신문(東亞貿易新聞)』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경영이 여의치 않아 휴간에 들어갔다. 이를 아다치 겐조[安達 謙蔵, あだち けんぞう][1864~1948]라는 일본인이 『조선 시보(朝鮮時報)』로 명칭을 변경하고 1894년 11월 21일 변천정(辨天町)[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일대]에서 재창간하였다.

[형태]
정확한 판형은 알 수 없으며 발행 면수는 6면에서 4면으로 줄어들었다.

[구성/내용]
『동아 무역 신문』의 지령을 계승하고 일어뿐만 아니라 한글 기사도 포함하였다. 편집국 조직이 경파(硬派)와 연파(軟派)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아마도 뉴스를 분류할 때 경성 뉴스와 연성 뉴스로 나누는 데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경파란 정치, 경제 관련 뉴스나 논평, 해설 등 흥미보다는 실제 필요한 정보 중심의 뉴스를 말하고 연파는 이와 달리 지식이나 정보가 되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가벼운 읽을거리 중심의 뉴스를 말한다.

[변천과 현황]
아다치 겐조가 서울로 떠난 후 『조선 시보』의 사장에 다카키가 취임하였다. 그 후 1910년까지 『조선 시보』의 경영은 안정된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15년 『조선 시보』는 자본금 2만 4000원의 합자 회사였던 조선시보사가 운영 주체로 되어 있으며 다카키가 사장을 맡고 있었다. 사무실은 부산 판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부산 일보』와 마찬가지로 6면 발행에 구독료는 월 40전이었다.

『부산 일보』가 1919년 주식회사로 전환하자 『조선 시보』도 1919년 4월 10일에는 자본금 25만 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운영 체제를 정비하였다. 본사의 주소지는 부산 판천정 3정목 2번지였으며 취체역(取締役)에는 다카키를 비롯하여 전부 네 명이 선임되었다. 이때 『조선 시보』는 사옥을 개축하고 사원을 늘려 지면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는 주식회사를 해산하고 사장 다카키가 퇴사하면서 한동안 휴간하였다.

1920년 7월 말에는 『조선 시보』 경영에 참여한 바 있던 구 간부들이 모여 합자 회사를 만들어 재창간을 시도하였다. 이때 사장은 아마카와 히로키치가 취임하였다. 1925년에는 사장 아마카와 히로키치가 자금을 투자하여 증자하고는 무한 책임 사장이 되었으며 신사옥도 건설하였다. 그 후 『조선 시보』는 부산뿐만 아니라 마산, 대구 등 조선 남부 주요 도시에 지국을 설치하여 블록 신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경쟁지인 『부산 일보』가 날로 확장되어 가면서 『조선 시보』는 상대적으로 점차 위축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자본금 25만 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하였지만 1933년 도판을 보면 자본금도 10만 원으로 감소되어 있고 발행 면수도 4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8년 1월 10일 새벽에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사옥 일부가 불에 타 9,000원 정도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화재로 인해 신문 발행이 어려워져서 시내 부평정의 천정 인쇄소에 의뢰하여 계속 발행하였다. 조선시보사는 1940년 2월 15일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000원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실업 신문을 표방하면서 사세를 확장해 나아가던 『부산 일보』에 뒤처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조선 시보』는 1941년 5월에 조선총독부언론 통폐합 방침에 따라 『부산 일보』에 통합되면서 폐간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보』의 특징은 일본의 구마모토[熊本]에 있던 『규슈 일일 신보[九州日日新報]』의 지부로 출발하여 후에 독립하였으나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기자로 출발하여 주필을 거쳐 사장까지 역임하는 다카키를 비롯하여 사원 거의 모두가 구마모토 현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른 지역 사람은 주필 등 간부가 될 수 없었다.

『조선 시보』는 출판 사업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1897년 『도한자 필휴(渡韓者必携)』라는 제목의 책을 발행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들이 사업을 벌이고 정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각종 법령, 국제 조약 등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으로서 후에 사장을 맡게 되는 다카키가 편자로 되어 있다.

발행 부수가 초기에는 『부산 일보』보다 『조선 시보』가 조선이나 일본에서 더 많이 배포되었지만, 1910년대부터 그 격차가 대폭 줄어들었으며, 일본에 배포되는 부수는 『조선 시보』가 큰 차이로 앞섰지만 한국 내의 배포는 『부산 일보』『조선 시보』보다 더 많아졌다. 이후 비록 『부산 일보』에 통합되었지만 초기 『조선 시보』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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